일어나보니 새벽이었다.
"흐암.. 아직 졸리군.."
살짝 추운 감도 있지만 바람이 선선하다.
"이제 어쩌지?"
아, 맞아. 일찍 떠나야하지.
안 맞게 갑자기 일어나니까 정신이 몽롱하다.
간단히 씻고 떠날 채비를 해서 오니 어르신은 아직 주무시고
계셨다.
"다행이군. 괜히 깨울까봐 걱정했는데.."
어르신께 어제 받은 지도가 품안에 제대로 있는지 확인해본다.
그대로 잘 있군. 자, 출발하자..
"어르신, 안녕히 계세요. 감사했습니다."
인사를 나지막히나마 하고 떠난다.
저벅, 저벅, 저벅...
발 소리가 줄어들어가자 노인은 눈을 슬쩍 떴다.
"... 후.. 갔나?"
노인이 몸을 일으켜 다시 나무 그루터기에 앉았다.
"녀석, 왜 이렇게 오래 걸려? 이러다 다 늦어서 도착하는 거 아닌가 몰라?"
노인이 숲 속 어딘가를 멀찍이 응시했다.
".. 조만간 다시 한번 피바람이 불겠군.. 빨리 이곳도 청산해야겠어. "
노인이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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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이 새벽의 눅눅한 공기.. 흠~흠 흠~"
랑트는 기분이 매우 상쾌했다.
그 까닭은.. 일이 너무나 수월하게 풀리고 있어서였다.
족히 3시간은 걸린다고 예상한 거리.
하지만 랑트는 벌써 1시간도 채 다 지나지 않아 도착했다.
그리고 도시의 병사들이라곤 다 곯아 떨어져 있고
거리엔 오가는 사람은 커녕 쥐새끼 한 마리도 없다.
이러니 흥이 나지 않겠는가?
여기서 잠깐, 랑트가 48시간동안 헤맨 숲 속. 이걸 어떻게 한 시간만에 돌파를 했느냐? 랑트가 갑자기 기적의 명약이라도 먹었나? 답은 간단하다. 원래라면 직선 거리(지름 길을 타지 않으면 좀 험난하다)인 것을 높다는 이유로 원형으로 뺑뺑 돌고 있던 것이다.
게다가 원래 북문으로 나갔던 것을 서문으로 다시 들어오게 되니, 자연히 그 거리는 금방 대폭 줄었고 이에 예상 거리는 1시간 반 정도이나 길을 헤맬 경우 대략 3시간 정도로 예측한 것이다. 하지만 지름길을 타고 금방 도착했기 때문에 랑트는 별로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우뚝 서있는 사자상 뒷편에, 계단, 그리고 그 위로 거대한 탑.. 아니 건물이 보인다.
"여기가 황실 기사단 입구인가.."
세련된 장식이 아로새김 되어 돌출되어 있는 아치형의 입구가 그를 반겼다. 규모가 실로 웅장했다. 그 앞에 서면 어떤 사람이라도 자신의 초라함을 깨우칠만큼.
랑트는 떨리는 기분으로 계단을 올라갔다. 문을 열려고 다가가는 그때, 발 쪽에 뭔가 둔탁한 느낌이..
"우당탕"
크윽..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내가 왜 쓰러져 있는 거지..?하는 생각들이 스쳐가는 찰나, 그 순간 선명한 금속성 소리가 들려왔다. 검집에서 칼이 뽑아져 나오는 그런.. 설마?
고개를 들어 위를 쳐다보니 어떤 누님.. 아니 어떤 여기사가 칼을 뽑고 나를 싸늘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네놈은 누구냐. 바르키스 남작이 내 뒤를 캐라고 보낸 첩자냐?
"..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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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장. 어쩐지 일들이 너무 잘 되간다 했다.
그럼 그렇지. 꼬인 내 인생... 이렇게 형장의 이슬(?) 아니.. 고문당해 죽는 사람이 되는구나. 다가올 운명에 눈물을 감추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니, 그런데 막상 죽을 때가 되니 눈물이 안 나네.
..아냐 다시 생각해보니 억울해! 왜 내가 죽어야 하는거지?
".. 빌어먹을 신분제.."
멈칫, 포승줄에 양손이 묶인 나의 앞에서 또각또각 걸어가던 그녀가 멈춰섰다.
아차, 나도 모르게 감정이 격해져서 그만.. 입 밖으로 생각을 내뱉다니..
"그게.. 무슨 소리지?"
"..네? 아 저 그게 순간적으로 그냥.. 어.. 그러니까.."
입이 파르르 떨린다. 말을 못하겠으면 손짓발짓이라도 해야되는데 손이 묶여있으니 뭔가 설명하기에도 숨부터 막혀오는 느낌이다.
이거 욕설했다고 가중처벌 되는 거 아니야?
"전.. 일부로 그랬던 건 아니고.. 그러니까.. 마음의 소리가 그만.."
.. 그녀가 더 수상스럽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다.
"아 아니! 그건 제 속의 마음의 소리가 아니고! 그러니까.. 아니 저 그게 세상에 그런 책이 있는데!".. 머리가 대략 멍해진다. 아아 지금쯤 고문 3~5개쯤 항목이 추가되지 않았을까. 내가 원래 이렇게 말을 못하는 놈이었나?
여기사가 칼을 뽑아들었다.
".. 뭔 소린지 알아들을 수 없는 변명 따윈 집어치우고.. 빌어먹을 귀족제라니, 그게 무슨 소리지? 황실에 반역하는 건가?"
"귀족제까지는 아니고.. 빌어먹을 신분제라고 했긴 했습니다만.."
여기사의 눈이 크게 떠진것도 잠시,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티키나 타카나. 그게 그거지. 이거 아둔한 놈이로군.."
한심하다는 듯 경멸하는 눈초리라니. 이런.. 외통수인가.
"네 놈, 바른대로 말해라. 바르키스 남작같이 신분 혈통 중시하는 인간이 보낸 심복은 아닐테고.. 이 이른 새벽에 뭐하러 쥐새끼처럼 야금야금 쳐들어온거지?"
"그게.."
그녀는 이목구비가 선명했고, 장신이었다. 붉은 빛이 감도는 갈색의 눈동자는 이는 타오르는 불꽃처럼 새빨간 머리칼과 함께 어우러져 이목을 잡아끌었다. 눈에서는 신기하게도 이따금씩 황금빛의 안광이 번득였는데 이는 홀린듯 계속 쳐다보게 될 정도로 뇌새적이었다. 문제는 분노하고 있는 그녀의 눈동자를 받고 있자니 소름끼치게 무섭다. 드래곤 앞의 먹이같은 느낌이랄까..
가만히 그녀가 나를 노려보고 있다가, 콧바람을 한번 뀌고는 칼을 다시 거둬들였다.
".. 아니, 보아해서는 약간 바보같기도 한데.. 만약 정말 바보라서 여기 어쩌다 서성이다 걸린 거라면 눈감아주고 풀어줄 수도 있지."
"..정말입니까?" 나이스 찬스다! 잘 하면..
"그래. '나는 바보입니다!" 라고 크게 삼창을 하면 적절하지 않겠어? 자! 한번 해봐!"
그녀가 내 시야앞에 대고 왼 손가락을 '딱'하고 튕겼다.
"저.." 정말 해야하나? 이거 하면 뭔가 인간 실격 느낌인데..
그녀의 입꼬리가 아주 실룩 거리는게 뭔가 벌써부터 얄밉지만 여기서 오히려 뭔가 한번 승부수를 던져보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바보 취급을 받는 거, 진짜 바보 행세를 대놓고 앞에서 한다면 어쩌면 나를 진짜 바보로 여겨 풀어줄지도 모른다..!
"저는 바보입니다! 저는 바보입니다! 저는 바보입니다!"
통로 사이로 '저는 바보입니다!'하는 소리가 계속해서 울려퍼져나갔다.
눈을 질끔 감고 임무를 완수(?)한 나는 그녀 쪽을 쳐다보았다.
"늦었어. 동네 바보치고는 생각을 오래 하더군. 무엇보다 그 추잡한 눈동자를 이리 굴렸다 저리 굴렸다 데룩데룩 굴리는 게 너무 티나던데? 흠.. 뭐, 어떤 의미에선 바보가 맞는 것 같기도 .."
추.. 추잡한.. 데룩 데룩..
마음 속 깊은 심연에서부터 수치심이 올라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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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은 끌려간 심문 실에서 나는 일들의 자초지종을 설명하고야 말았다. 결국 이렇게 털어놓게 될 것을, 만세.. 아니 바보 삼창은 왜 했던 거지.. 크흑, 수치스럽다. 하늘 아래 구름 한 점 부끄럼 없이 살았는데 다른 의미로 큰 수치가 하나 생길 줄이야.
어차피 죽을 몸 깔끔하게 떳떳하게 죽을 걸 말이다.
체념을 하며 어떤 각도로 맞고 고문을 당해야 조금이라도 덜 아플까, 그리고 나는 어떤 고문들을 당하게 될까 이런 생각들을 머리에 떠올릴 즈음에 여 기사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니까, 귀족의 얼굴을 복날 개 패듯이 팼고, 그 결과 그래도 탈주하려 했다? "
".. 네."
"..헌데 촌장과 숲 속 현자의 만류로 생각을 돌려 황도로 돌아왔다 이거지?"
여기사가 칼등으로 자기 손바닥을 툭툭 치며 말했다.
"뭐.. 정리하자면, 네, 그렇겠죠."
"푸핫!"
갑자기 여 기사가 빵 터졌다. 뭔가 먹잇감을 붙잡은 드래곤.. 아니 냉철한 특전사 같은 이미지의 그녀가 갑자기 웃기 시작하니까 어안이 벙벙했다.
"...그런 농담을 나보고 믿으라는 건가? 이 카리얀이?" 여자가 다시 웃음을 거두고 진지한 표정으로 날 쳐다보았다.
카리얀?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데..
"농..농담 아닌데요. 진짠데.."
여기사가 당장이라도 날 잡아먹을 듯 쏘아 보다..
3초 뒤. 씰룩. 5초 뒤 씰룩씰룩. 눈초리가 둥그래진다.
"푸.. 푸하하하하하!!"
여자의 웃음소리가 저렁 쩌렁하게 울려퍼졌다.
아니, 뭔 놈의 웃음소리가 이렇게 커? 대체...
왠만한 성인 남자 3명이 고래 고래 소리를 질러대도 감히 못 견줄 정도의 발성이었다.
쭈뼛쭈뼛한 내 모습은 마치 하이에나 앞에 놓인 하룻 강아지와도 같은 모양새였다.
"저.. 왜 그러시는지.."
"어? 크큭.. 네 표정이 너무 웃겨서.. 큭.. 어? 오랜만에 웃어서 눈물이 다 나네.."
여성이 칼을 검집에 다시 집어넣고는 다시 키득대며 눈가에 미약하게 고인 눈물을 닦았다.
도대체 다들 왜 그러는 거지.. 어르신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는데..
"이걸로 확실해졌군. 네놈이 시골에서 올라온 것은 확실한 것 같다. 또 바르키스의 개가 아닌 것도." 여성이 일어서며 말을 했다.
"내 이름은 카리얀.. 황실 기사단의 부 군사직을 맡고 있지."
여성이 나에게 다가왔다.
" 제안을 하나 하지, 내가 널 살려두는 대신, 너는 내 충실한 심복, 특히 여기서는 밀정.. 쉽게 말해 스파이가 되는 거다. 수락하겠나?"
음.. 이거 왠지 신중해야 할 것 같은 질문인데.. 라고 생각
"물론입죠. 살려만 주시죠. 헤헤.."
..한번 수치심을 버렸더니 아예 발동이 되버리는 것일까? 머리로 고민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사이 나도 모르게 생존 본능이 잽싸게 반응을 해버렸다. 입밖으로 나간 걸 주워 담을 수도 없고..
"좋아, 풀어주지.."
여성이 내 의자 뒤로 오더니 내 손에 묶인 포승줄을 풀어준다.
"자, 그럼.."
저..저기요? 손도 풀어주셨는데 왜 저한테 가까이.. 밀착하시는 거죠?
두둥. 눈 앞에 은도금과 금도금 장식이 선명하다. 이.. 이건.. 플레이트 메일? 갑옷이잖아? 그런데.. 왜 이렇게 두툼하지? 설마?
"저.. 저기 가슴이.."
심히 부담스럽다고 말을 꺼내려는 사이, 여성이 내 얼굴을 잡고 들어올린다.
"저.. 뭐하는..? 읍!"
입술이 머리로 다가오는 게 느껴진다.. 헉! 이건.. 설마 키스?
달콤한 향에 코를 간지럽히며 촉촉한 감촉이 이마에 닿는 게 느껴진다.
휴. 키스는 아니구나. 다행이야. 이렇게 남에게 첫키스를 뺏겨버릴수는..
"자, 넌 방금 내 심복이 되는 의식을 마친거야. 네 머리에 항상 내 명령과 나를 상기하여 행동하도록."
여성이 입술을 떼더니 머리칼을 쑬어넘기곤 싱긋 웃었다.
"입단 신청서는 금방 가져놓을 테니 사람들이 오기 전에 빨리 작성을 해. 부 군사의 자격으로 특별 승인을 해주도록 하지."
"명령은 입단한 뒤 교육 종료 시 따로 찾아와서 하달할 것이니 그렇게 알도록."
.. 멍..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상기해보려 했는데
얼굴에 들이닥친 플레이트 메일 봉우리 두 쌍(?)의 이미지와 이마에 닿은 보드라운 입술의 감촉만 생생하게 느껴졌다.
이게 뭐지? 난 살아있게 된 건가? 고문도 없이? 나 기사가 될 수 있는 거야? 이런 식으로? .. 꿈인가?
어안이 하도 벙벙해서 볼을 세게 꼬집어 보았다.
"크악!"
너무 세게 당겨버렸다.. 현실임이 분명하다.
너무 아파서 오른 손으로 싸매고 있을 때쯤 카리얀이 다시 찾아와서 한심한 눈으로 쳐다보고 입단 신청서를 책상에 놓고 떠나가며 한 마디를 건넸다.
"아, 감히 본좌에게 반하거나, 그러면 곤란한 거 알고 있지? 아무리 내가 아끼는 심복이라도 나한테 반하게 되거나 하면 무조건 즉결처형이야."
"..네.. 잘 알겠습니다." 뭔가 단단히 오해가 있는 것 같아 풀어주려다가.. 입방정을 떨지 말자. 죽을지도..하는 생각이 들어 입을 다물었다.
조용히 책상 위에 놓인 깃털을 찾아 잉크를 잘 묻힌 뒤 신청서에 이름을 단정하게 적었다. 카라얀은 또각 또각 문을 향해 걸어가다가 문득 돌아보고는, "혹시나 해서 그래도 하는 말인데," 하고 입을 열었다.
"그냥 하는 말이긴 한데 명심해야한다? 나는 남자라는 거. 물론 알고는 있겠지?"
...
... 네? 뭐라구요? 남자..?
덜컥.
주르륵.
책상을 잘못 쳐서 잉크병이 솓아졌다.
앞에 있는 서류들이 마치 랑트의 불운한 앞날을 예고하는 듯 까맣게 물들어갔다.
카리얀. 34세에 준장을 단 존재. 황실 기사단 부군사의 역할. 궁에서 검술로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검술의 달인이며 철혈의 전략가로 불리는 천재 중의 천재. 그는 여성의 복장을 하고 다니거나 남색을 하는 등 기행을 하는 것으로 매우 유명했다.
"아아아--아아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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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피아에서 절찬리 연재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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