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태 카톨릭으로서 여러 번 성경을 검토해보았는데, 이에 있어서 상충되는 부분은 오히려 기존의 교리나 설명에 있어서 왜 그러한 가에 대한 설명이 더 부합하여 맞아 떨어지는 부분이 존재한다.가령 삼위일체가 그러하다.
원래 삼위일체의 경우, 아우구스티누스가 이를 설명하려고 시도하였으나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여 끙끙 앓다가 잠에 들었는데, 꿈에서 계시를 통해 천사가 나타나, 바닷물을 컵으로 나르는 것과 같다는 비유를 통해 현재 인간의 이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는 결론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인류에게도 비로소 컴퓨터 화면을 통한 그래픽 프로그래밍이라는 것이 가능해졌다. 프로그래밍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면, 세계를 하나의 게임으로 놓고 보았을 때, 신이 게임개발자이자 창조자이고, 성자는 이러한 신이 현실 속에 만든 계정이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신은 직접 성자라는 GM계정을 통해 플레이하며 사람들을 인솔하고, 이렇게 살라고 가르치며 스스로 사람들이 하느님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 가에 대해 모범을 보인 것이다. 한 가지 풀어내지 못한 점이 있는데 성경에 따르면 성자와 신은 성령을 통해 이어지는데 이 성령에 대한 이해는 다만 아직 인류가 정확히 이해할 만한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 만약 나의 통찰을 가지고 성령은 무엇일 것이라는 아이디어나 통찰이 있다면 이에 대해 의견 교환을 자유롭게 해주길 바란다.
물론 왜 그때는 게임적 세계에 대한 설명을 안 했는가? 하는 생각이 들 수 있다. 성경의 중요한 포인트는 성경에 등장하는 여러 상징과 계시들은 당시에는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내용들이 상당히 많으며 나중에 지나고봐야 이해가 되고 오히려 맞아떨어지는구나 하고 이해가 되는 부분들이 있다. 사실 신이 직접 인간에게 무언가를 설명한 것을 기록한 것이 성경이라면, 이를 받아적은 그 고대인들의 지식 수준은 결코 현대와 같을 수 없을 진대 그저 당시로서는 설명가능한 온갖 용어를 찾아서 갖다 붙였어야 타당하지 미래인들이 이해하고 있는 지식 수준과 용어 정의 수준과 동일하기가 어렵다. 이렇기에 상징을 통해 이해하지 않고 있는 문자 그대로 성경을 이해해버리면, 심각한 문제점이 발생한다. 카톨릭 교회에서는 성경을 상징으로 이해하라고 하는데, 이에 대한 이유도 이와 다르지 않다. 만약에 그 당시 천사가 게임에 대해서 중세인들에게 설명을 해보려고 한다면, 난감함을 느꼈을 수밖에 없다. 아직 문명수준이 이를 이해할 수 있을만큼 따라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게임을 꿈이나 구름 위에다가 그린다고 한들 그냥 또 하나의 신기한 경험이지, 이에 대한 개념을 이해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즉 천사가 보여주는 것을 미래에 대한 예언 혹은 현실의 사물에 대한 상, 계시 정도로만 보았을 것으로, 어쩌면 너가 이해할 수 없는 것임을 인식시켜주는 게 최대한의 설명방법이었을 수도 있다.
근대에 다윈의 진화론과 개신교회의 창조론은 충돌해왔다. 그러한 까닭은 개신교회의 신학의 경우 출발은 가톨릭의 전대사를 면죄부로 오해하여, 부정부패 없는 자신만의 교회를 만든다는 것이었지만, 기존의 카톨릭의 영향력을 떼올만한 요소들만 집어넣어서 성사의 전통을 해체하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교회를 만들려다보니 '성경 중심주의'로 들어가는 선택을 해버렸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도리어 성서에 있어서 예수님이 격렬히 비판하였던 교조주의, 율법주의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것은 여러 폐단을 낳았는데, 이는 사람들을 자유롭게 함이 아니라 사람들을 구속하는 성향으로 돌아가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성경과 문자 그대로 일치하지 않는 지식인들의 사고는 무조건적으로 부정하는 사고로도 이어진다.
많은 분들이 갈릴레이 갈릴레오의 사례를 들어 '카톨릭 교회'가 과학을 탄압하지 않았냐는 견해를 보이는데, 이것은 심각한 오해이다. 갈릴레이 갈릴레오는 끝까지 카톨릭을 믿었으며, 또한 카톨릭 내부에도 갈릴레오와 친분이 있는 높은 성직자가 존재했기 때문에 끝까지 그의 편의를 봐주었다. 갈릴레오의 갈등은 '과학의 새로운 이론'이 기존의 '과학 권위자'에 저항하면서 발생한 충돌로도 이해할 필요성이 있다. 이들에 있어서 심판 만약 갈릴레오의 갈등을 순전히 종교 vs 과학으로만 여기지 않고 과학 권위자와 새로운 발상의 갈등으로 이해한다면 권위에 의한 수많은 방해로 지연되었던 근현대의 과학은 역사를 고려할 때 더 빠르게 발달할 수 있었을 수도 있다. 카톨릭은 심지어 갈릴레오의 주장의 원안이 되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의 경우 자금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코페르니쿠스가 성직자, 그것도 대주교였다는 점을 우리는 이해해야한다. 이러한 온전한 분석 없이 짤막하게 잘라서 교과서에 등장하는 연유는 이에 대한 전반 사정을 일부 학자들은 알고 있지만 특히 종교에 대한 부분에 있어서 일본식 설명을 그대로 차용해버리는 탓에, 유럽 전반과 카톨릭과의 긴밀한 역사적 관계에 대해 충분히 전달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Indulgence, 전대사를 면죄부로 번역해버린 일제식 부족한 설명이 그대로 들어오다보니, 카톨릭이 부패한, 기존의 과학발전와 대립하는 관계로만 설명을 하는 인식이 초기에 잘못 잡히게 된다. 이러한 설명을 좀 더 잘 전달하는 영상이 있는데 이는 이 영상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_nLZ3rglaCs
https://www.youtube.com/watch?v=JbgwAE827Fc
오늘날 많은 학자들이 이를 한쪽에 치중된 편향적 시각이라고 비판하는 까닭은, 도리어, 카톨릭의 경우 오늘날 학자라는 뜻의 영어는 Scholar, 장학금은 Scholarship이라고 불리는 등의 까닭은, 카톨릭 교회로 인해서 지식의 여명이 시작했다고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고대와 달리 중세에 들어서는 카톨릭 교회를 통해 똑똑한 자는 무상교육을 받을 수 있었고, 지식을 서로 공유할 수 있었다. 서고에도 자유로운 출입이 가능했다. 흔히 중세를 지식의 암흑기라는 표현을 하는데, 이것은 틀린 말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책임을 카톨릭에 전과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볼 수 있다. 오히려, 중세의 카톨릭에 의해서, 지역별로 흩어졌던 정보가 신이 만든 '이 세계에 대한 온전한 이해'를 위해서 중앙에 종합되고, 서로 논의되며, 수도 없이 많은 수학, 과학, 철학적 정보와 기록들이 바빌로니아 이후로 처음에 가까울 정도로 방대하게 저장되고 다시 재분류되었다는 것을 유념할 필요성이 있다. 카톨릭이 없었다면, 인류사의 정오를 환하게 비추게 되는 르네상스라는 태양은 떠오를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여명이 시작되는 지점, 즉 여명 그 자체가 카톨릭 교회가 서방에 완전히 퍼지기 시작한 때라고 봐야하기 때문이다. 완전히 퍼진 카톨릭 교회가 수집한 방대한 자료들은 지식인들이 비로소 한 곳에서의 지식인이 아닌, '세계'적 차원의 지식이 되었고, 정보의 교류를 통해 '본질'에 해당하는 정보가 무엇인지 추려내게 되었으며, 이렇게 방대한 자료들이 쌓이기 시작하고 교육받기 시작하자 스스로 사고할 수 있는 '지식인'들이 양성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지식인들은 숙식을 걱정할 필요 없었고, 학자로서 연구만 충실히 해도 되는 환경이 갖춰지게 되었다. 바로 이 '지식인'들이 존재할 수 있는 환경이었기에 고대의 '일상적 삶'이나, '종교적 가치관'과는 다른 해석으로 세계를 설명할 필요성과, 지식인으로서의 삶은 유지하고 싶되 '종교적 삶'과는 분리된, 다른 삶을 살아가고 싶은 열망이 차후 생기면서 비로소 르네상스가 출발하게 되는 것이다. 즉, 그만큼 방대한 자료를 모아서 근거자료로 활용할 수 있을 만큼이어야 종교나 왕권의 권위를 뛰어넘은 '지식의 권위'가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단순히 르네상스를 고대에서 가져온 것으로만 생각하지만 실상은 갑자기 빛이 나기 시작한 것이 아니다. 역사적인 흐름에서 '갑자기' 발전하는 것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철저하게 인과관계 하에서 발전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단점이 없는 것은 명확히 말해 카톨릭 교회의 부패의 증거는 단 한번, 세상의 권세와 같이 의탁하여 '마녀사냥'을 긍정했을 때로, 이는 개신교와 카톨릭 교회 구분없이 다같이 부패하여 타락했을 때이다. 사실 카톨릭 교회는 원래 마녀라는 개념의 존재가능성에 대해서 원천적으로 불가한 개념이라고 선을 그었었다. 그런데 이러한 입장을 쭉 견지하다가, 세속에 타락하여 이를 개신교와 동일하게 권장하는 양태를 보였던 것인데 이는 지역유지들과의 강력한 결속과 관계가 있다. 신교의 칼뱅처럼 화형을 즐기는 정도까진 아니어도, 심각하게 부패하여 그 판결에 있어서 동의했던 문제로, 이것은 카톨릭 교회가 지고 있고 인정하고 넘어가야만 하는 거대한 죄이다. 이와 같은 종교적 타락은 다시는 있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문제는 새들하고도 대화를 했다고 일컬어지는 성 프란치스코에 의해서 전면적인 카톨릭 교회의 개혁을 통해 청산이 되었고 의식적인 수준에서의 정화가 이루어졌으나, 우리는 언제나 이러한 교조주의로 사람들을 예속하고 묶고 단죄하는 행위에 대해서 주의와 신중을 기할 필요성이 있으며, 카톨릭 교회의 본원은 인간 정신에의 구원에 있음을 항상 유념할 필요성이 있다.
그러한 기조 아래에서 다시 한번 성경을 들여다보자.
상징으로서 받아들여진 것에 대한 오늘날의 관점에서 상상력을 발휘하여 보자.
프로그래머의 눈에서 보는 창세기란 어떠한가?
신이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였다는 구절은 과연 어떻게 받아들여지는가?
노아에게 더이상 이러한 거대한 개입은 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구절은 어떻게 받아들여지는가?
"4차원적 이상의 차원에 존재하는 프로그래머"라고 볼 때, 신은 '말'로써 세계를 프로그래밍하였다." 고도
해석이 가능하다.
"큰 틀의 로직 구조를 더 이상 뒤바꿔버리지 않겠다."는 선언으로도 이해가 가능하다.
여러분들도 그렇게 해석이 되는가?
신의 이름을 알리지 말라고 한 것 또한 다른 종교에 비하면 그럴 듯 하다. 보통 창조자의 이름이 등장하는 경우가 많은데 희한하게도 등장하지 않는다. 이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자면, 개발자의 이름을 npc에게 알려줬더니 개발자 이름을 욕하고 다니고, 개발자 이름을 팔고 다니는 현상이 일어나니까 이러한 현상을 제재하는 것도 곤란하니 아예 체계 안에서 지워서 부를 수 없는 단어로 구성하거나 신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라고 지시한 것이다. 즉 자식이 그 아버지의 이름을 사칭하거나 막 부르고 다닌다면 아버지 기분이 어떨지 생각을 해보자. 아버지도 그런데 심지어 피조물 AI가 창조자, 개발자 본인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고 욕하고 사칭한다면? 신이라는 개발자는 이와 같은 상황을 인지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래서 지성이 부여되는 한 창조자, 신과 같은 지칭명사가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이름 자체는 안 일러준 것이다. 약삭빠른 신이라 욕할 수 있을 지 모르겠으나 역지사지로 우리가 신의 입장이라면 당연히 그렇게 설계할 것이다.
프로그래머의 입장에서 성경을 들여다보면 어떻게 그 시대에 이런 관념이나 개념들이 등장하는 지 의문이 들 정도로 그 당시 주변 사회에는 없고 근현대에 와서야 이해가 가능할 법한 내용들이 등장하는데, 만약 세계 자체가 3차원 이상의 게임, 혹은 시뮬레이션이라고 본다면 그런 부분들이 일정 부분 해소되는 지점이 있다. 이른바 이를 성경의 (프로그래밍적) 특이점이라고도 할 수 있다.
만약 이것이 통 속의 뇌에 사로잡혀 갇혀버린 나만의 해석이나 이해가 아니라면,
어찌보면 프로그래밍을 이해하는 자만이 성경을, 나아가 신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지 모른다.
그것은 돌고 돌아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영역, 양자역학이 실재하는 우리 세계에 대한
좀 더 온전한 이해가 가능하게 할 수도 있다. 어쩌면 양자역학에 대한 새로운 실마리를 우리는 찾게 될 지도 모른다!
물론 나의 설명은 아직까지 카톨릭 교회에 제출한 바가 없는 만큼 정설은 아니다. 단지 여러 철학적 시도이다.
시간이 지나고 보면 나의 주장 중 비판받을 만한 부분은 선명해져 쉽게 남들이 베어낼 수 있게 되고, 그 중 통찰을 통해
유의미한 해석이나 제대로 된 이해에 가깝도록 한 부분은 남아서 누군가의 학설에 이바지하게 될 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