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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on écrit >/엘 더 비스크

2화.

처형인은 도끼를 높게 들어 올렸다.
들어올려진 도끼를 보며 번쩍이는 칼날이 예리하게 잘 갈렸구나.. 나도 다행히 한 방에 가겠구나 같은 생각들을 하고 있을 때 였다. 하긴, 도끼가 뭉특해서 여러번 왔다갔다하면 처형받는 입장에서 곤혹도 그런 곤혹이 없으니까. 이왕이면 한 번에 깔끔하게 보내주는 것이 낫다.

갑자기 군중들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어어? 저건 뭐지?"

비행기..아니? 내 머릿속에서 무슨 이상한 단어가 떠오르는 거지?
하늘에 검푸스름한 형체가 이곳 하늘을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날개를 쭉 뻗은 거대한 새의 형체를 하고 있었다.
가만히 계속 보니 검붉은 색으로 보인다..

어..엄청나게 거대한 형체가 이곳을 향해 날아오고 있다.
그 모습은 마치.. 비늘이 빨갛게 빛나는.. 도마뱀??

내가 서 있는 자리뿐만이 아니었다.
이 마을 전체, 아니 최소한 이 성벽 전체.
햇빛이 닿을 수 있는 모든 곳에 거대한 그림자가 가라앉았다.
그 순간 그 자리의 모든 공기가 얼어붙었다.

모두가 알고 있었다.
우리의 머리 위에 있는 게 무엇인지.
하지만 차마 입을 뗄 수 없었다.
정녕.. 그것이란 말인가?
믿고 싶지 않은 현실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머리가 쭈뼛 달아올랐다.
손이 달달 떨리고, 손 끝이 차가워지는 감각.
당장 뭐라도 해야하는데, 머릿속이 새하얗다.
어떻게 해야하지?

그 순간 머리 위에가 데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뜨거운 공기가 내 머리 위를 스쳐지나가는 느낌?
순간 나는 그저 머리 끝이 쭈뼛한 줄 알았지만
이미 머리가 달아오를 때로 쭈뼛 달아오른 상태가 아닌가.
이 느낌은 마치, 마치..

그 존재가 계속해서 깊고, 길게 숨을 들어쉬었다.
마치 이 공간에 있는 모든 산소란 산소를 흡입하려는 듯..

브레스를 준비하는 건가?

그 생각을 하는 순간 용은 입을 크게 벌리기 시작했다.
"크롸롸라라라라라라라라라라라라라라!!"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

처음 보았다.
반지름만 해도 2m는 족히 되는 불덩어리가
한 생명체의 목젖에서 튀어나오는 모습을..
상식적으로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허나 저 존재라면 가능했다.
저 가공할 존재라면..

그리고 처음 보았다.
한 인간이 도끼를 높이 쳐든 상태 있는 그대로
불덩어리에 융화되어 녹아내리는 모습을.
닿았고, 비명을 지르며 타들어가더니, 녹았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악!"

그제서야 우리는 시선을 도마뱀의 비늘이나 브레스가 아닌 다른 것에 돌릴 수 있었다.

죄수였다. 묶인 채로 엎어져서 앞으로 굴렀던 것이다.
죽음을 기대하며 원망하는 눈빛으로 하늘을 계속 보고있던 그는 누구보다 빨리 용을 봤을 것이다.
그것이 간발의 차로 그가 살아남을 수 있던 천운이었다.

그리고 그의 소리침이.. 우리가 보고 있는 모든 게 현실임을 깨닫게 했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악!!"
"용이다!!!!"
"도망쳐!!!"

시민, 병사 할 것 없이 아수라장이 펼쳐졌다.

탑은 무너져서 불타고 있었고 
광장은 잿더미였다.

용은 병사들에게 달려들었고 몇몇 병사들을 산채로 집어삼키려고 덤벼들기 시작했다. 
중갑을 입고 칼들을 차고 있던 병사들은 마지막 저항으로 칼부림을 해봤지만 전혀 소용이 없었다.
많이 하면 5합, 보통은 3번 칼 휘둘러보고 머리가 사지랑 분리된 채 어금니로 씹어먹힌 게 다리처럼 투구가 발톱에 걸린채 용에게 먹히기 일쑤였다. 아까 처형장 바로 뒷편에서 혼자 몰입해서 오동통한 손가락으로 박수를 치고 있던 펭귄 녀석은 온데 간데 보이지 않았다. 브레스를 직빵으로 같이 맞은 모양이었다.

"이봐!! 뭐하는 거야? 빨리 여기로 와!!"
릭슨이 소리쳤다.

나도 모르게 넋을 놓고 있었던 것이다.

그나마 아직 타지 않은 탑에 릭슨이 서 있었다. 그곳으로 달려가는데 용의 꼬리가 스칠 뻔했다. 다행히 방금 한 병사를 입으로 물고 다른 병사들을 목표로 날아가고 있어서 그런지 이쪽으로 시선을 돌리지는 않았다. 탑으로 간신히 세이프다.

"이봐, 괜찮은가? 자칫하면 자네도 물려갈 뻔 했구만." 
"휴, 고마워요. 근데 이제 어떡하죠?"
"어떡하긴. 엘더 지방으로 이동해야지."
"네? 그 쪽으로 가려면 평지를 한참 달려가야... 그러면 잡히"
"어휴, 이 사람. 머리를 써야지, 머리를."
릭슨이 쯧쯧하며 말을 끊었다.

"네? 그게 무슨 소리죠?"
"자, 성에는 늘 위급상황을 위해 마련된 비상통로가 있기 마련이지. 주로 지휘관들이 쓰는. 자네도 알아두라고."
"그게 무슨..아!!"

릭슨은 지하통로를 통해 이곳을 나갈 계획이었다.
말하자면 이미 파져있는 땅굴을 통해 이동한다면 보다 안전하게 멀리 도망칠 수 있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그 방향은 산악으로 둘러싸인 엘더 지방. 그곳이면 상대적으로 용의 무차별적인 공격을 피해 다닐 수 있으며
옆의 헬타 성에 보호를 요청해 강력한 군대의 수호를 받을 수 있다는 이점이 있었다.

포탑의 지하로 내려가는 길은 생각보다도 어둡고 퀴퀴했다. 아니 음산하다고 해야하나?

쥐들이 우릴 보고 도망치고, 감옥 같은 곳에 썩어 비틀어져 말라버린 해골 같은 것들도 있었다.

"크악!"
"무슨 일이에요 릭슨?"
릭슨이 선두로 횃불을 들고 앞서나가고 있었기 때문에 무슨일을 당하면 그것이 내 위험과도 직결되는 것이었다.
(횃불을 구하는 것은 매우 수월했다. 막대기는 널려있었고 무엇보다 사방이 온통 불타고 있었으니까.)

"저 놈의 쥐 새끼들이 내 발가락을 또 물었어!"

릭슨의 발가락이 퉁퉁 불어있었다.
사실 그럴만 하긴 했다.
아까 수레에서도 깨고보니 약간의 청국장 냄새가 나서 의아해했느데 릭슨의 발가락 쪽에서 상당한 발냄새가 났다.
그게 자꾸 쥐들이 섞은 치즈인 줄 알고 물어뜯게 하는 모양이었다.

또 의아한 점 중 하나는 동전들이 땅바닥이라던가, 책상(!)이라던가 곳곳에 뿌려져있었다.
왜? 어째서?싶었지만 괜히 건드렸다가는 이상한 잠금장치가 해제되어 사지가 4개로 해체될까봐 조심조심 걸었다.
동전은 아깝긴 하지만 나중에도 다시 와서 주워가면 된다. 일단은 용이 들이닥치기전에 빨리 도망가는 게 급선무이다. 

.. 라고 분명히 얘기를 마쳤던 것 같은데..

앞에 가는 릭슨이 동전이란 동전을 느릿느릿 죄다 주워가고 있었다.
"릭슨!!"
"아 뭐! 이만한 기회가 어디있다 그래! 난 이곳에 다시 안 올거야!!"
"휴.."
탈출할 수 있을까?

한숨을 막 내쉬는 그 때였다.

릭슨이 매우 크고 반짝이는 스패니쉬얼리즈 금화를 집어든 순간 전격이 날아들었다.

치지지지직

"커헉! 이게 뭐야!!"
"릭슨!!"

엉겁결에 나도 모르게 릭슨을 감싸려 몸을 날렸는데 다시 금화에서 전격이 차올랐다.

츠즈즈즈즈즉

"큭!"

하복부가 따갑다. 이미 타오르는 느낌이다.

"크헬헬헬..걸려들 줄 알았다. 이녀석들.."

흑마법사였다.

"제길.. 제국놈들은 흑마법사를 암암리에 고용해서 고문과 통로감시등을 병행한다는 게 사실이었나.."
"..." 
잠시 릭슨을 쳐다보며 '그걸 아는 사람이 그래?' 라는 생각을 하긴 했으나 일단 상황이 상황이니 넘어가기로 했다.

"크헤헤헤.. 그게 중요한가? 아무튼 너희가 나갈 수 없다는 게 중요하지. 그 황금색 금화의 저주를 지닌 한, 너희는 절대 나갈 수 없다. 내가 죽기 전까지는 말이지.. 켈켈켈켈!!"

제길.. 이렇게 갇힌 채로 죽는건가?
주마등처럼 아까 감옥에서 비쩍 말라있던 해골 시체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래?"

-스겅-
릭슨이 칼을 뽑아들었다.
"그러면 죽이고 가면 되는 거 아닌가?"
"크크큭크크..다들 그런 생각을 하곤 하지."
흑마법사가 배를 움켜잡고 웃었다.
"츠츠츠츠츠"
흑마법사가 해골 문양의 반지가 끼어진 손을 들어올렸다.

그 순간, 릭슨이 한 마리 표범처럼 날렵하게 뛰어들었다.
"헛!" 흑마법사가 뒷걸음쳤지만 품안까지 파고들은 릭슨.
"근거리? 하지만 롱소드는.."
"페이크다 이 자식아."

오른 손을 반대 가슴팍에 손을 넣더니 흑마법사가 두건으로 가리고 있는 얼굴에 냅다 단검을 찍어버리는 릭슨. 
그 눈빛이 흉흉하게 빛나는 게 몹시 강렬했다.

"크아아아악! 내 눈!"
생전 느껴보지 못한 아픔에 몸부림치며 눈을 손가락으로 가리는 흑마법사를 두고 릭슨이 호흡을 가다듬더니 롱소드를 뒤로 길게 뻗었다.

- 파칭 -
- 덜거럭 덜거럭 -

"주.. 죽여버리겠어!" 피를 흘리며 뒤로 물러난 흑마법사가 전격 마법을 시전하려는지 손을 뻗는다.
스파클가 일어나더니 전격이 손가락에 스치는 순간.

- 쌔액 -
릭슨의 롱소드가 해골반지가 끼어있는 손을 뚫고 그대로 두건 속으로 그대로 박혔다.
"크헉!"

흑마법사가 등을 구부리며 릭슨을 피해 뛰어왔다.
직감이 왔다. 
이 때가 적기인 것 같다.

칼을 휘두를.

-  스각 - 
-- 카가가가각 -

"커헗헒헑; 쿯ㄹ럭"
흑마법사의 심장에 꽃혀 등을 뚫고 나온 내 숏 소드.

피를 토하는 흑마법사.
"크륵..턹.. 카하람ㄱ아락"

각혈 수준이다.
거참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죽네..

뭔가 어설프게 내지른 것 같은데 오히려 정통으로 찍혔나보다. 내 입장에선 다행인데 아프긴 엄청 아프겠지..

"잘했네. 고생했구만. 칼을 생각보다 잘 쓰는 군."

릭슨이 말을 건네며 다가왔다.
사실 내가 할 말이다. 난 막타만 친 셈이니까.

"..무슨 말씀을."

솔직히 말해서는 그렇게 금화를 경망스럽게 주워대서 약간 동료로 삼기엔 실망스럽다고 생각했다고 말하기 뭐했다. 그래서 그냥 얼버무리기로 했다.

그러고 잠시 얘기를 나누면서 걸어갔던 것 같다.

릭슨은 자기 덕분에 흑마법사를 미리 꾀어내 잡아낸 것이라면서 동전을 줍지 않았다면 흑마법사가 나중에 나타나 우리를 기필코 함정에 빠트렸을 거라고 했다.

... 솔직히 미덥지 않고 같잖은 변명 같다.
하지만 녀석의 신위를 봐서는 막상 부정하기에는 좀 어려운 면이..

그렇게 고민 아닌 고민(?)을 하고 있을 때에쯤 빛이 나타났다.
다시 경망스럽게 뛰쳐나가는 릭슨.
"탈출이다!! 탈출!!"
초록이 우거진 수풀 속 길을 따라서 와다다다 달려가는 릭슨..
아니 잠시만! 난 길도 모른다고!!

"잠시만! 릭슨!! 어이!! 야!! 이 개..*9*---**- *8*-"
멈춰보려고 했지만 이미 멀리 뛰쳐나가서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허허. 허허허허.
하는 수 없다. 나도 릭슨이 뛰쳐나가는 방향으로 뛰어가야지..

지하통로와 수풀의 경계를 넘어가는 순간, 신선한 공기와 따스한 햇빛에 잠시 경이를 느꼈다.
아름답다. 확실히 어두컴컴하고 퀴퀴한 냄새만 맡아오다가(특히 릭슨의 발냄새가 섞인) 이렇게 깨끗하고 맑은 곳으로 넘어오니 신기하기마저 하다. 어쩌면 릭슨이 저렇게 뛰쳐나가줘서 다행인걸까?

나비도 잠깐 스쳐지나가는 게 잠시 우리가 용에게서 잠시 우리가 용에게서 멀리 도망치고 있다는 사실을 잊을 뻔했다.

근데 릭슨 그 녀석 대체 어느 방향으로 간 거지. 
기억도 잃고 길도 모르는 난 그냥 발 닫는 길로 걸어가기로 했다.
수풀이 이렇게 많은 쪽이 아니었던 것 같긴 한데..
어라? 왜 이렇게 수풀이 많지?
..라고 생각하는 순간 뭔가 의아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왠지 모르겠지만 고개를 숙여야할 것 같은 일종의 의무감?
아니 목 뒤편이 따끔따끔 거리는 게 느껴졌다.

- 쌔액 -

고개를 다시 들어보니 거대한 워-엑스가 보인다.
두꺼운 털옷을 걸치고 있네.. 이렇게 날씨가 좋은데?
게다가 모르는 사람한테 도끼를 휘둘러? 미친 놈 아냐 이거?

"크헤헤, 통행세를 내놓아라! 이곳은 나의 구역이다!"
"통행세? 난 그럴만한 게 없.. 아!"

아까 릭슨이란 놈이 눈이 돌아간 채로 미친듯이 줍던 금화가 떠올랐다.

"야.. 통행세? 줄게!!! 줄게!! 아.. 저기 릭슨이란 놈만 잡으면 어떻게든 되거든? 잠시 진정하고 기다려봐!"

"자발적으로 낼 생각이 없으면 죽여서 가져가주마!"

아니, 낸다고.. 이 자식아.
하는 수 없이 민간인(?)인 강도를 상대로 칼을 뽑았다.

칼을 뽑으면서 일단 방어만 해야지..하고 생각했다.

"야 잠시 말 좀 들어봐"
"하압!"

챙 

"저기 강도씨"
"허업!"

채챙

"아니 돈 준다니까? 돈 준다고!"

"헙!"

채챙

뒤로 가면 절벽이다. 이러다간 밀려서 죽게 생겼다.

하는 수 없다. 옆을 파고들까?
아니야. 워엑스는 사정거리가 길다. 위험해.
그렇다면.. 이번에는 내가 미리 칼로 밀어내야지.

나는 그렇게 칼을 뻗었고

-뎅겅-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머리와 그 목이 달린 몸통을 깔끔하게 이등분해버렸다.

"에엥??"

이렇게 되면.. 내가 벌써 두명이나 죽인 거야??
***** ******* ******** ********

나는 꿈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고 있었다. 뭔가 불길했던 느낌과 일치하는 것 같기도 하고.. 살인자라는 말들..
그 공포감.. 글쎄. 그정도로 무섭다기보단 이번에는 거의 황당했는데.. 등등의 생각을 하며 천천히 길을 밟았다.

졸지에 원치도 않았는데 하루만에 갑자기 살인마(?)가 되어버린 (비록 흑마법사랑 강도를 상대로 했다는 게 다르긴 하지만) 나는 그렇게 차분히 걸어가고 있었는데 아래에서 릭슨이 전속력으로 훅훅 거리면서 뛰어가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와.. 마라톤 선수인가? 
릭슨도 간단한 중갑은 차고 있었는데 저렇게 빠르게 뛸 수 있다는 게 놀라운 따름이었다.
 
엄청나게 열과 성을 다해 달려가는 그를 쫓아서 나도 덩달아 뛰기 시작했다. 다행히 아래로 내려오는 길목과 그가 가는 방향이 일치해서 한참 돌아갈 필요없이 쉽게 교차되는 지점으로 내려와 그를 계속 추전.. 아니 따라갈 수 있었다.  그를 따라 뛰다보니 마을 어귀를 표시하는 듯한 비석과 덤불이 양쪽을 감싼 둥근 아치형의 짧은 통로가 보였다.

"릭슨!! 어이!! 멈춰봐!! 야!!
..헉 ..헉.. 제길, 더이상은 못 뛰겠네."

나는 하필이면 망토 아래 중장갑을 차고 있었던 것이다.
이걸 의식하지 못한 채 릭슨 녀석 때문에 달려오느라 온 몸이 땀으로 젖어들었다. 다리도 너무 아프긴 하지만 온 몸이 너무 무겁다. 뭐, 릭슨 녀석이 대체 어디까지 내달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마을까지 온 이상 마법사만 정상적이라면 여차하면 순간이동 포탈도 쓸 수 있고.. 필요한 건 어느 정도 구할 수 있겠지.

한 가지 걸리는 건 아까 제국군들이 용들을 상대할 때 마법사들이랑 고관대직들이 메테오 한 방에 다 같이 골로 가고 재만 남아서 불타오른 걸 봤는데 혹시나 이 마을의 마법사도 그 중에 있던, 차출된 마법사들은 아닐까, 그런 걱정부터 들었다. 하지만 설마 설마 하다보면 진짜가 된다고, 나는 긍정적으로, 아니 믿고 싶은대로 믿기로 했다. 무엇보다 릭슨 녀석처럼 미친 망아지가 고삐 풀린듯이 뛰어가기엔 온 몸이 너무 지쳐있다.

잠깐 숨을 고른 후 찬찬히 걸어가자 선선한 바람도 불어왔다. 경치는 꽤 괜찮았다. 마을 어귀 옆쪽에는 강이 잔잔하게 흐르고 있었다.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마을 입구를 지나 안쪽으로 들어갔다. 마을은 큰 길 옆으로 건물들이 나란히 오손도손 붙어있었다. 평지를 걸어가면서도 규모가 한 눈에 잡히는 게 이곳은 매우 작은 마을에 속했다. 그말인즉슨..

"제길, 마법사가 없을 수도 있다는 건가."

절로 한숨이 나온다.
드래곤이 만약에 방향을 뒤틀어 이쪽으로 온다면 단숨에 이곳 전체가 아작날 수도 있는 판이다. 그런데 순간이동을 시켜줄 마법사가 없을 수도 있다니..

순간, 릭슨이 뒤도 안 보고 똥꼬에 불이라도 난듯 미친듯이 달려가던 모습이 생생히 떠올랐다.
이제야 이해가 간다. 릭슨은 이곳의 지리를 잘 알고 있던 것이다. 충분히 위험지대라는 것도.

"ㄱ-*-자식, 중갑옷을 벗고 뛰라는 말이라도 해주던가."
,, 그렇지만 그렇게 뛰기엔 이미 나는 무게에 짓눌려 지쳐버렸다. 
이렇게 된 거 마을이나 좀 뒤져봐야겟다.
그나마 커보이는 빨간 지붕의 집으로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자세히 보니 문틈이 약간 열려 있었다.

똑 똑

"계신가요?"
안에서 두런 두런 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저벅 저벅 저벅
어깨가 넓은 듬직한 인상의 사내가 문을 열어줬다.
덩치에 비해서는 험상 궃거나 그렇진 않고 뭔가 서글서글해보이는 인상이었다. 콧수염이 인상적이었다.
"안녕하신가. 누구시오? 이 마을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지나가는 나그네입니다. 음.."
막상 뭐라고 해야할 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솔직하게 말해봐?

포로로 잡혀왔었는데 내가 누군진 모르겠고 드래곤이 성벽에 나타나 구사일생으로 도망쳐왔습니다?

.. 라고 다짜고짜하면 나를 미친 놈으로 보거나 신고할 지도 모를 것 같아서 우선 용건만 물어보기로 결정했다.

"저.. 이 마을에 마법사가 있나요? 그.. 여긴.. 규모가 작은"
사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규모가 작은?"
아차. 
"규.. 규모가 작은.. 강! 강도가 나타나서 이렇게 당하고 말았지 뭡니까. 하하.. 저 혹시 마법사가 있다면 불러주실 수 있나요? "
사내의 얼굴이 다시 풀어졌다.

"허허, 이거 아쉽게 되었다만. 마법사님께서는 겨울 동안 이곳을 진료봐주시다가 며칠 전에 핸거스 골락 성에 다시 올라가셨다네."

앗. 마법사가 근방에 있다는 소린가?

"보아하니 큰 상처는 없는 듯 한데 그 정도라면 마법사님께서 만들어주고 가신 포션 몇 병으로도 충분할 걸세. 어디보자..":

사내가 등을 돌려 상자들을 뒤적거리더니 뭔가를 꺼내더니 몸을 들썩이다가 다시 상자 옆을 뒤적이며 새로운 발견이라도 한 것처럼 큰 소리로 외쳤다. 

"아! 여기 특제 쿠키랑 와인을 여기다 뒀었구만! 행색이 담을 많이 흘린 게 지쳐보이는 데 이것도 들게나. 목 축이고 허기를 달래는 데 많은 도움을 줄 걸세."

"감사합니다!"

아, 맞다. 물어볼 게 있지.
"저.. 핸거스 골락으로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내가 잠시 멈칫했다.
"자네.. 핸거스 골락으로 갈 생각이 있나? 가려면 저 눈 덮힌 산 골짜기를 지나야하는데?"
"괜찮습니다. 사실.."

이쯤에선.. 그래도 말해도 괜찮겠지?

"성벽안의 마을에 하늘을 나는 드래..아니 몬스터가 출몰했습니다. 온 동네가 난리가 났고 사람들을 마구 잡아먹고 있어요. 저는 그곳에서 여기까지 도망쳐온 것이구요."
"뭣? 아니. 뭐? 자네. 그게 사실인가?"
사내가 충격받은 표정으로 손을 부들부들 떨며 되물었다.

드래곤이라고 했으면 아마 뒷목잡고 쓰러지지 않았을까?
왠지 걱정되서 두루뭉술하게 넘어간 게 되려 다행이었다.

"네.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큰일이군.. 마을에 비상을 선포해야겟어."

사내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자네, 소식을 전해줘서 참 고맙네. 음..핸거스 골락으로 간다면 내 편지도 전해줄 수 있나? 나는 이 마을의 이장인 시몬일세. 그곳을 지배하는 타거티스님께 내 편지를 전달해준다면 마을을 지켜줄 지원군을 틀림없이 파병해주실 거라네. 나는 그동안 마을을 통솔해서 대피지시를 내려야해서, 직접 갈 수가 없다네."

시몬이라고 자신을 밝힌 사내가 지그시 내 눈을 바라보았다. 나무를 많이 베어서 그런지 굳은 살이 박힌 뭉특한 손이 내 어깨로 올려지자 일종의 부담감도 느껴졌다.

뭐, 어차피 가는 길인데 뭐. 도와줘서 나쁠건 없겠지.

"그러죠. 대신 좀 빨리 갈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요?"

시몬이 고민하다가 구석에서 뭔가를 꺼낸 후 탁자에서 뭔가를 끄적거리다가 종이와 포션 세 통을 내게 다시 전했다.
"왠만한 상황이 아니라면 남에게 주지 않는 건데, 대단히 비싼 포션이라네. 한 포션은 두어 시간 동안 추위를 견디게 해주고, 다른 포션은 속력을 높여주며, 또 다른 포션은 신체 회복력을 높여준다네. 단, 두 세시간 정도가 지나면 효력이 사라질 수 있으니 너무 무리하지 않도록 주의하게나. "

시몬이 물을 들이켜 목을 축이고는 숨을 골랐다.

"길은 이 마을에 나 있는 가운데 큰 길을 쭉 가다가 왼쪽으로 꺾어지면 개울을 건너는 작은 통로가 있네. 그곳을 지나서 길을 따라 걷다보면 흰 산이 등장한다네. 그 산을 이 약도대로 걷다보면 어느새 금방 핸거스 골락에 도착할 걸세. 그리고 이 편지는 꼭 전해주게. 자네만 믿겠네."

기억은 자세히 나지 않지만 왠지 그럴 듯 해 보인다. 색깔부터가 반짝반짝 영롱한게 어두컴컴한 일반 회복 포션보다는 뭔가 값자체가 엄청 비싸보이긴 한다. 이렇게 유난히 반짝거린다는 건 제조 과정에 보석을 마법에 사용하거나 아니면 귀한 버섯같은 걸 재료로 아낌없이 퍼부어넣었다는 거겠지..

"알겠습니다. 꼭 전하도록 하죠." 
일단 속력 포션만 들이키고 품 안에 넣기로 했다.
오.. 심작박동이 빨라지더니 혈류가 빨리 도는 듯한 기분이 든다.
왠지 무게와 찌뿌드드한 피로가 누적되어 있던 게
세포 하나하나까지 다 개운하게 씻겨진 느낌?
마라톤이라도 당장 해야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시몬의 집을 박차고 나갔다.
콰ㅏㅣ ㅣㅏㅏㅇ
어라. 다리 힘이 약간 조절이 안 된 기분인데.

"이봐! 그렇다고 쾅 하고 !^!$&!!^!"
이미 멀어져서 잘 들리지가 않는다.
일단 흰 눈이 쌓인 방향으로 큰 길을 따라 달리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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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보는 3화:

"으어어어어어엌"
춥다...   미친듯이 춥다

내가 대체 이 산맥을 어떻게 지나가야 하는 거지?
시몬의 말대로 금방 산맥을 찾을 수 있었고 일단 나 있는 길을 따라 걷기로 했다. 물론 하도 눈이 많이 쌓여있어서 원래 어디까지가 길인지 찾기가 힘들긴 했지만.. 뭐, 일단 약도대로 걸어가다보면 뭔가 나오겠지. 기억은 안 나지만 아마 길치는 아니었을 거야. 암.

"허어허헣"
잠시 손을 비비면서 가만히 있으려니까 발이 얼어붙는 느낌이 난다.
시몬.. 최소한 털 옷 정도는 빌려 줘야지..
솔직히 말해서 어떻게 얼마 거리 차이도 나지 않는 구간에서 이렇게 온도 차이가 날 수가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콧물이 나고.. 입가도 약간 얼어붙는 게 진짜 얼어죽을 지경이다.
어쩐지.. 강도 녀석이 털옷을 입고 있더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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