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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a philosophie >/통찰

추가적 설명 : 현대적 자본에 대한 관념(a.k.a. 자본주의)과 마르크스주의 (현 시대의 이데올로기) 에 대한 분석

*원래 인간은 불나방이라는 깨달음 글에 적었던 사유이나 너무 글이 중구난방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따로 분리해서

깨달음은 깨달음대로 두고, 확장적 사고는 확장적 사고대로 나누기로 했습니다. 이 점 감안하고 읽어주세요.

 

현대적 자본에 대한 관념(역사적 자료나 뭐로 보거나 자본은 항상 인간사에 존재했고 그것이 유통되는 시대상에 따라 거기에
인간이 부여하는 관념이나 생각이 달라졌을 뿐이라고 보기에 자본주의라는 사상이 존재한다고 보기 어렵다. 필연적인
도구일 뿐이고 항상 존재하며 따라서 나는 19C부터 21C에 해당하는 시대 속에 현존하는 현대적 자본에 대한 관념적 현상이라고 표현하고자 한다)도 공산주의도 마찬가지로 본질적인 가치를 치워버리고 유물론에 갇혀 버리는 것은 마찬가지.

 

특히 마르크스가 경제적으로 궁핍한 생활을 많이 하게 되면서 본래의 종교나 사회 등에서 가르치거나 다루는 사랑 등의 본연적 가치를 부정하고, 돈과 인간만을 가지고 다루다보니(물질계라는 개념 하에서만 놀다보니) 대조군으로 노동을 새로운 가치로 두고 소외라는 개념으로 노동 소외를 부정적으로 보았는데, 이것은 유항산 유항심을 잘못 이해한 자들의 행태와 비슷하다.

 

본질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바가 있고 나서야 항산을 확보해야 항심을 유지하는 것이 의미가 있는 것이지, 본질적 가치를 배척하고 배제한 후에 물질적 요소 중에 다른 걸 가치로 삼아 항산을 아무리 확보한다해도 행복(ex 유년기 폭력과 괴롭힘에 노출된 아이의 가정에서의 화목과 평화 등)은 형성되기 어려운 것이다. 어디까지나 근원적 가치를 존중한다는 베이스에서 그걸 따라갈 때 기본적인 생계가 확보되어야 그 마음이 항시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이지, 무턱대고 항산만 많다고 해서 (돈은 많지만 자식을 학대하는 자) 행복을 만들지도 못한다. 

 

근현대사가 아닌 인류 통사를 놓고 볼때, 특히 고대로 들어가면 들어갈 수록, 인류 공동체는 부당하게 노동 소외를 겪은 자들에게서조차도 노동 소외에 대한 논의나 흐름보다는, 스스로를 다스리거나 가르침을 통해서 타지 않는 법을 추구하는 흐름이 관찰된다. 이는 과거에는 노동 소외가 그렇게 절박하고 간절하며 중요한 가치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노동은 노동일 뿐인 것이지 그것이 인격체로서의 가치나 자아실현을 유지하는 것과는 별개의 개념인 것이다. 로마에 끌려온 카르타고 인들이, 혹은 멸망한 국가에서 끌려와 노예가 된 이들이, 노동을 축복이라 생각하였을까 옥살이라고 생각하였을까? 마르크스의 관찰은 어디까지나 근현대의 단편을 보고서 근현대 서양의 사회 분위기상 유효한 얘기만을 하였을 뿐이다.


물질적인 가치가 주가 된 세계에서 관찰한 것과 달리 본질적인 가치를 인간이 추구해야할 제 1가치로 우선시되는 사회 속에서는 오히려 물질적 세계에 대한 관심보다는 가치적 세계에 보다 관심이 있었고, 그 중 일부가 사후세계라는 개념을 빌어 설명하기 본질적 가치에 대한 중요성을 제창하기 시작한 것이다.

 

[ 부연설명: 물론 죽음을 관찰하면서 그러한 본질적 가치에 대한 고찰이 보다 빨리 형성되었을 수 있다. 그러나 신이나 초월적 존재의 개입 없이 본질적인 가치를 느끼기 이전에 사후세계에서 다뤄야 할 가치를 다룬다는 것은 논리 서순상 불가능 하므로, 기록이나 사료는 부족하다 할 지언정 타당성에 비추어 본질적인 가치가 먼저 다뤄지고 사후세계도 다뤄졌을 것이라고 본다. 초월적인 존재의 개입을 상정하여도, 지금과 같이 사상과 생각에 대한 상당한 자유의지를 부여한 상태라면, 인간이 스스로 본질적인 가치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기도 전에 그 가치에 빌어서 다른 세상 밖의 것을 설명하기 어려우므로, 그 가치를 터득하기를 기다렸다가 계시 등을 통해 설명하는 편이 높지 않았을까. AI가 선과 평화, 자유의 개념을 학습하기 전에 사후세계를 설명하면서 선하게 살아야 세계 밖으로 나와 평화 속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설명하기 어려운 것과 같은 이치이다. ]

 

인간은 근원적으로 가치를 쫓는 존재이고 그 가치를 위해 살면서 살아남기 위해 도구적으로 노동이나 물질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물질을 적정한 수준을 넘어서 탐하다가 불에 빠져 타죽게 된다. 또한 무리의 어지럽힘이 크면 클수록 죄없는 인간이 죽고 다치고 하는 일이 많아 불에 빠지지 않으려는 자들도 휩쓸려 불에 다 같이 타죽는 경우도 생긴다. 이에 가치를 쫓는 사람들은 단체를 만들어 서로 도우려 한 것인데, 이 안에서도 탐욕에 빠지는 자들이 나오거나 아니면 전체적인 관리를 위해 필요한 규율 등을 다루다가 표면적인 무언가에 집착하여 본연적 가치와는 다른 압제와 착취를 형성해버리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렇기에 노동소외가 근현대에 와서 압제와 착취의 하나의 형태로서 나타나는 지금이라 해도, 이러한 노동소외를 다루기 위해서는 본질적 가치를 배제한 후 나머지를 다루면서, 그렇다고 본질적 가치의 빈 자리, 빈 칸을 채울 것이 필요하니 여기에 노동을 신성화하여 노동소외를 무엇보다 중요한 본연처럼 다룰 것이 아니라, 본질적 가치를 본연의 자리인 위에 두고 물질적 가치를 아래로 두고, 다만 관리자나 분배자로 하여금 스스로 악에 빠지지 않게끔 경각하게 하는 것이 보다 중요한 것이다. 그 후에 노동 소외를 다루고 그것이 본질적 가치에 비추어볼 때 도덕적인 일인지, 합리적인 타당성이 있는 지 아닌지를 다루는 것이 이치와 순서에 맞지 않는가?

 

적절한 수준의 빛과 적절한 수준의 안락함은 자연스러운 하늘의 태양 빛에서도 나온다. 그렇기에 인간의 만족감이 적절히 충동되는 것, 물욕이 적정 수준까지 충족되는 것은 이상이 없다 할 것이다. 따라서 특정한 상품에 내재된 가치는 그러한 만족감이 그 상품을 향유한 인간이 그러한 만족을 느끼기 때문이고, 그것이 인간이 노동을 하였기에 가치가 부여되었다는 노동신성성과 같은 개념과는 무관하다. 다만 인간이 완벽하지 못한 불나방에 불과하기에 때로는 별로 가치가 없거나 혹은 사기나 기망이 들어간 제품들도 사기도 특정한 안락함이 충족될 것이라는 기대 속에 사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적절한 안락함만을 추구하며 인간이 살지는 않기에 타지 않는 법을 연구하면서 제품을 사거나 투자하고, 기부하기도 한다. 

 

특정한 종교나 신을 믿어야 한다는 얘기가 아니다. 신론은 별개의 논의를 할 문제이다. 그러나 그것이 설령 무신론이라 할 지언 정, 어떠한 존재의 종교나 사회에 대한 신념은 한 개별체가 본인이 속한 세계, 즉 자연과 인간 세상을 살아오면서 느끼고 겪은 가치관이자 그러한 삶의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에게 존재하는 두 본연적 욕구에 대한 탐구이자 고찰이며 투쟁의 역사의 결과다. 마르크스는 종교를 치워버림과 함께 손쉽게 같이 엮여있는 인간의 도덕에 대한 갈구, 스스로 타죽지 않는 방법에 대한 고찰에의 본연적 욕구와 그 탐색 가능성을 아편 취급과 함께 배제해버렸다. 이로 인해 기존에 다루어지던 본질적 가치에 대한 탐색은 저 멀리 뒤편으로 가버리고 단지 자본과 인간과 노동소외에 대해서만 다루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간편하게 이분법적으로 종이 베듯 잘라내는 방식은 인류의 움직임을 규정하고 분석할 때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원칙을 범한 것과 같다. 하나의 악, 하나의 아편을 규정해놓고 치워버리면 뒤에 자신이 열심히 그려놓은 현 사회의 문제점 진단도를 설명하고 다루는 데 편리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인간은 왜 그러한 구조를 취하게 되었는가, 왜 인간은 자본에 스스로를 종속시키게 되었는가와 같은, 현 상황을 분석한 그림을 보고 들게 되는 이유에 대한 탐색을 배제해버리게 된다. 이러한 행태는 특히 인류를 연구할 때 흔히 생기는 오류 중 하나로, 인간 사회에서는 인간들의 특성과 사건들이 겹치며 무수히 많은 복합적인 요소들이 서로 엮여서 어마어마한 파급효과를 낸다는 점을, 결론을 내려다 그러한 특성 자체를 없는 셈 치고 치워버리고 보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인간사에서 압도적인 영향을 미쳐온 종교임에도 불구하고, 자본과 인간을 본격적으로 다루기 위해 이 둘에 집중하고 나중에 다루겠다는 수식언으로 보면 충분할 것을, 편의를 위해 아편이나 환상 취급을 하며 서로 엮여 있는 개념들을 싹 다 배제해버리면서 그가 치워 버린 것은 단순히 종교가 아니라, 근현대에 형성된 자본에 대한 시대관념이 그토록 냉혹하고 인간소외적 양태를 보이는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 이유와, 근현대에 자리잡은 자본에 대한 시대관념의 오류를 제대로 고치고 보다 인간을 덜 타들어가게 하는, 바람직한 자본에 대한 시대관념으로 재구조화하는데 보다 완성된 형태로 구성해 내놓을 수 있는 기회와, 그 책을 읽은 사람들의 불에 타들어가는 것에 대한 본연적 두려움에서 나온 탐색 의지였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인류사에 큰 사달을 내고야 말았다. 종교계에서 변질된 가르침으로 불나방을 불에 타들어가도록 이끌었던 적이 있듯이, 노동을 신으로 삼은 새로운 이데올로기가 새로운 종교가 되어, 서로가 서로를 죽이기 시작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