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La philosophie >/통찰

II. 슬픔에 대하여

 

 

 

   II. 슬픔에 대하여

 

 

◈ 나는 슬픔이라는 감정을 가장 적게 가지고 있는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다. 세상 사람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특별한 호의로써 이 감정을 존중하지만 나는 이 감정을 좋아하지도 않고 존중하지도 않는다. 사람들은 슬픔으로 지혜와 덕(德)과 양심을 장식한다. 이 얼마나 어리석고 괴이한 장식인가! 이탈리아인들은 이 감정을 사념(邪念 : tristezza, 슬픔과 사념 두가지 뜻을 지니고 있다.)이라는 말로 표현하는데 이는 매우 적절한 표현이다. 이 감정은 언제나 유해하고 광적이기 때문이다. 스토아 학파에서는 이 감정을 비겁하고 저열한 것으로 보아 금하고 있다.

 

- 이 대목에서 우리는 라틴어가 몽테뉴 생전에 지니고 있던 위상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카톨릭 국가여서 프랑스에서 바티칸의 라틴어가 차지했을 위상도 물론 있겠지만, 라틴 언어의 계보를 이어내려오는 것으로 정통성을 인정받는 프랑스의 로망스어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한다. 즉, 이런 얘기가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몽테뉴는 오늘날로 치면 국어의 어원을 가져다 그것이 본디 무엇을 의미하는지 가져온 것이다. 그런데, 이 시대의 대다수의 인간이 그랬을 지는 모르겠지만, 몽테뉴는 용감함을 숭상하고 슬픔과 같은 자연스러운 감정을 억제하고 제한해야하는 것으로 인식한다. 허나, 과연 이성을 통해 슬픔을 그저 외면하거나 억누른다고 해서 삶이 정상적으로 기능한다고 볼 수 있는 걸까? 역사속의 다른 여러 사례들을 살펴보면 그렇지 못한 경우가 더 많음을 알 수 있다. 슬픔을 이성을 통해 제대로 억누른다하더라도, 우리의 이성이라는 것도 일종의 경향성의 총체처럼 보이는 경우가 많으며, 상황의 소요와 충격에 의해 흔들리기 쉬운 어떠한 것이다. 그러하다면, 충격에 의해 이성이 흔들려 잠깐 들어올려질 경우, 억누르고 있던 틈을 타고 슬픔이 밖으로 튀어오른다면, 오히려 더 높아진 반발력으로 인해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더 큰 충격으로 이성을 발휘하는 주체를 더 혼란에 빠트릴 가능성이 높다. 차라리, 평소에 자연스럽게 이 슬픔이라는 감정을 받아들이고, 적절하게 표출하고 해소할 수 있다면 이것이 삶 속에 주는 부정적인 영향력을 줄이는 하나의 방법이 될 것이다. 사실 슬픔보다는 분노에 있어서 사념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보다 적절한 것인데, 분노야말로 점차 커지면 커질 수록 '어디에서 왔는지 연원을 찾을 수 없는' 것으로 변질되는, 슬픔과 상처의 경험에 결합하여 그 정체를 속이는 외적인 잡념이기 때문이다. 다시 돌아와서, 이러한 슬픔에 대한 인식은 매우 타당한 것으로 보이는 것이, 몽테뉴가 다음에 나열한 사례들은 앞서 오히려 역설적으로 그러한 경향성을 증거해주는 것으로 보인다. 

 

◈ 이런 이야기가 있다. 이집트의 왕 프삼메니투스(Psammenitus)가 페르시아왕 캄비세스(Cambyses)에게 패하여 포로가 되었을 때의 일이다. 그는 자기 딸이 노예가 되어 물을 길러 자기 앞을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 모습을 본 친구들이 그의 주위로 몰려와 울면서 슬퍼했지만 그는 시선을 땅에 고정시킨 채 아무 말도 없었다. 그 후 아들이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모습을 보았을 때도 똑같은 태도를 취했다. 그런데 그의 친구 한 사람이 포로들 사이에 끼어 끌려가는 모습을 보자 그는 자기의 머리를 때리며 극도로 슬퍼했다.

 

◈ 얼마 전, 우리 나라의 한 공작에게도 이와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토렌토에 있던 그는 집안의 기둥이며 명예였던 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뒤이어 그의 희망이었던 동생이 죽었다는 슬픈 소식을 들었다. 그는 이 두 번의 충격을 훌륭한 인내로 견뎌냈다. 그렇지만 그로부터 며칠 후 그의 하인 한 사람이 죽게 되자 마침내 이 마지막 충격에 굴복하고 말았다. 그는 이제까지의 인내심을 잃고 비탄의 눈물을 흘렸다. 그러자 사람들은 그가 이 마지막 슬픔으로 가장 큰 충격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실은 이미 슬픔에 가득 차 있었으며 거기에 약간의 슬픔이 더해지자 그의 인내의 둑이 무너진 것이다.

 

◈  앞의 이야기에 대해서도 이와 똑같은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앞의 이야기에는 다음의 말이 덧붙여져 있다. 캄비세스(Cambylses)가 프삼메니투스(Psammenitus)에게, "아들과 딸의 불행에는 동요하지 않았으면서 어찌하여 친구의 불행에 대해서는 그토록 슬퍼했는가?" 라고 묻자 그는, "마지막 경우의 슬픔은 눈물로 나타낼 수 있지만 앞의 두 슬픔은 어떤 방법으로도 나타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라고 대답했다.

 

 이 이야기와 관련해 생각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이피게니아(Iphigenia)의 희생을 구경하는 사람들의 슬픔을, 그 아름답고 천진난만한 소녀의 죽음에 대한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이 품고 있는 슬픔의 정도에 따라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고대 화가의 심상(心像)이다. 마침내 소녀의 아버지를 그리게 되자 그는 모든 예술적 능력을 다했다. 그는 생각다 못해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그렸다. 어떤 표정으로도 아버지의 슬픔의 정도를 표현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일곱 명의 아들을 잃고 뒤이어 일곱 명의 딸을 잃은 불행한 어머니 니오베(Niobe)가 슬픈 나머지 돌로 변해 버렸다고 시인들이 표현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슬픔으로 인해 돌로 변했다. - 오비디우스(Ovid)

 

 

 시인들은 이렇게 묘사함으로써 견디어 낼 수 없는 재앙이 덮쳤을 때 돌처럼 굳어져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아무것도 듣지 못하는 망연자실한 상태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실로 슬픔의 충격이 극에 달하면 온 영혼을 마비시키고 그 활동의 자유를 방해한다. 그러므로 갑자기 매우 슬픈 소식을 접하게 되면 무엇인가 짓눌린 듯이 몸이 굳어 꼼짝도 할 수 없게 되며, 그런 다음에 영혼은 눈물과 탄식과 함께 풀리며, 비로소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어 영혼은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마침내 슬픔은 소리가 되어 겨우 흘러나왔다. - 베르길리우스(Virgil)

 

 페르디난드(Ferdinand)왕이 헝가리 왕 요한(John)의 미망인과 싸움으로 부다페스트를 포위했을 대의 일이다. 도이칠란트의 대장 라이작(Raisciac)은 전투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였던 한 기사(騎士)가 누구인지 알아보기 위해 갑옷을 벗겨 보니 바로 자기의 아들이었다. 모두가 눈물을 흘리고 있는 가운데 그는 말없이 눈물도 흘리지 않고 말뚝처럼 서서 아들의 시체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침내 슬픔의 충격이 그의 피를 얼려 버려 몸이 돌처럼 굳어진채 땅에 쓰러져 죽었다.

 

...

 

가벼운 근심은 말을 많이 하지만 극심한 근심은 말이 없다. - 세네카(Seneca)

 

 

+ 일찍이, 볼테르는 <철학서한>에서 "눈물은 말 없는 슬픔의 언어"라고 표현했다. 즉, 슬퍼질 수록 눈물이 난다는 것인데, 이는 슬픔이라는 감정이 격해질수록 우리 몸에서 이를 빨리 진정시켜야하는 요소로 인지하여 눈물샘을 자극해서 필요한 성분들을 흘려보내 독소를 배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만큼 빨리 해소하지 않으면 독이 되는 것으로, 이 슬픔이란 감정은 오래 묵혀두고 가지고 있어야할 것이 아니라 "쉽게 내보내고 흘려보내고 표출하고 해소되어야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사회적 접촉이 잦은 경우 더욱 그러하다. 이에 따라서 사람들은 대화를 통해 자신의 슬픔과 속상한 거리에 대해서 푸념을 늘어놓고 그러는 동안 일정부분 이러한 감정이 해소됨을 느낀다.  하지만 모두가 이러한 슬픔을 쉽게 해소할 수 있는 여건에 있는 것은 아닌데, 특히 사회적 편견을 의식하여 맥락과 상관없이 자유롭게 이를 표출하기 어려운 위치에 있는 경우 그러하다. 오늘날의 경우 보통 회사원들이 이러한 위치에 있으며 회사에서는 엄격한 사내 분위기 때문에, 가정에서는 괜히 자신이 회사에 있을 때는 다들 잘 지내고 있었고 어차피 잠시밖에 있을 수 없는데 이러한 얘기를 꺼내게 됨으로 가정의 분위기에 악영향을 미치게 될까봐, 또 그럴 경우 자신의 유일한 하루의 낙조차 없거나 가정에서만큼은 편하게 있고 싶었는데 그럴 수 없는 셈이 되므로 잘 표현하지 못하고 넘어가게 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러한 침묵으로 그 때 그때를 지나가는 것은, 점차 사소한 일들로 내면에 불안과 불만을 쌓게 되는 초석을 놓는 셈이 되며, 이는 결국 악순환을 낳으며 어느 기점부터 회사생활, 인간관계, 혹은 가정간의 불화나 흔들림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가능하다면 이를 공감해줄 수 있는 사람에게 가끔씩은 자신의 슬픔을 솔직하게 토로해주는 것이 좋다. ( 하지만 너무 빈도가 많이 일어나다보면 상대가 싫증을 내는등 역효과가 나올 수도 있다. 뭐든 적당한 게 상책인 편이다. )  또한 들어주는 사람도 마음을 열어주고 들어주는 자세가 필요한데, 이른바, 

 

상처는 내게 있지만, 그 고통은 내게 있다 - 찰스 9세 ( 중상을 입은 콜리니 제독에게 한 말)

 

라는 공감의 자세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다. 특히 가깝고 소중한 사람일 수록 시간과 마음의 여유를 갖고 상대방의 말을 깊이 되뇌여보며 진심으로 공감해주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한 사람의 삶을 살리는 정도의 차이를 낳을 수 있다. 우리가 그 스스로의 순례의 길을 대신 걸어갈 순 없지만, 그가 든 짐의 무게를 대신 일부분 덜어줄 수는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숨통을 가끔씩 트게 하고 잠시 군장을 내려놓고 어깨를 풀어주는 여유를 주는 것만으로도 그가 앞으로의 행군에 있어 다른 몇 번의 위기를 잘 헤쳐나가는 도움이 된다. 때로, 우리는 우리 자신들의 욕망과 고통들에 짓눌려 자신이 타인에게 줄 수 있는 선한 영향력의 크기를 망각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너무나 큰 규모의 고통 혹은 아픔으로 인한 슬픔의 경우, 나눠도 나눠도 그 짐이 줄지 않는 듯해 보이는 경우가 존재하는데, 이는 개인의 삶에 너무 황당하거나 말도 안되는 불의가 들이닥쳤으나 법적, 혹은 사회적이나 환경적으로 이걸 억지로 합리화시키며 개인에게 강요를 하는 경우이다. 그럴 경우 분노의 감정이 함께 치밀긴 하지만, 이 일이 장기적으로 해결되지 않아 지속적으로 스트레스를 주며 개인의 힘으로 무력함을 느낄 정도의 사건인 경우, 점차 슬픔과 우울의 감정으로 빠져들게 되곤 한다. 이에 관해서 아에킬루스는

 

고통스러운 삶보다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

태어나 불행한 것보다는 태어나지 않는 것이 더 낫다.    -  아에킬루스, <단편집>

 

라고 언급하였다. 이러한 인식은 사실 고통으로 인해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을 겪을 때 사람들이 자주 생각을 하곤 하는 것으로, 삶의 가치를 상실하였다고 생각하기에 죽음을 통한 현실도피, 내지는 고통에서의 탈출을 소망하기도 한다. 특히 강력한 심적 고통을 겪을 때 인간은 시야가 좁아지고 다른 주변에 대한 관찰을 소홀히 하게 되기 때문에, 주변에 있는 소중하고 가치있는 일들과 소소한 행복들, 그리고 나를 위해주는 사람들, 주변에 펼쳐진 세상의 아름다움등에 대해서 보지 못하게 되고 그저 삶을 불행한 것, 가치 없는 것, 끊임없는 고통과 갈등의 연속으로만 받아들이게 된다.  그렇기에 삶을 지속할 당위성을 잃게 되고 죽음을 선호하는 경향이 생겨 최종적으로 자살을 선택하게 된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사람들이 우울하면 고기 앞으로 가라고 하는 말은, 우리 주변의 소소한 행복 특히 원초적 본능에 해당하는 식(食)이 주는 기쁨에 대한 인식을 되살리도록 유도하는 것으로, 실제로 우울이나 슬픔등이 일정부분 가시는 경우도 존재한다. 단, 이 경우 스트레스가 풀린다고 너무 음식에만 집착하면 과식으로 인해 우리 몸의 균형을 해칠 수도 있으니 주의해야한다.  허나 이러한 소소한 행복들로 해소가 되지 않는 경우가 존재하는데, 가령 다음과 같은 사례를 들 수 있다.

 

  + 사례1.

 

  + 사례2.

 

 그러나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극기의 정신으로 스스로를 채찍질하여 일어서는 경우가 존재하는데, 실은 다음과 같은 인식을 바탕으로 하여 자아를 존립한 상태에서도 일어설 수 있는 것이다.

 

             비참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비참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어떠한 상태라도 그것을 지니는 사람이 만족하면 행복하다. - 보에티우스, <철학의 위안>

 

 보통 불교에서 해탈을 한다고 일컬을 경우 세속에 대한 미련을 버린다는 것으로, 본질적으로 동일한 인식을 기초로 한다. 사실 성직자가 되거나 출가를 하여 세속에 얽매이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을 해보면 삶의 지속적인 고통의 일부에서도 해방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어쩌면 그러한 것도 일종의 종교의 효능, 개인 삶의 구제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성직자가 된다는 것은 기존에 자연스럽게 누리던 것을 포기한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그 전에 누리는 것을 포기하여 이전부터 지속적으로 개인을 괴롭히는 굴레에서 해방될 수 있다면 개인이 느끼기에 이러한 예속이 삶에 주는 해방감, 만족과 효능이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비단 성직자가 되거나 출가를 하지 않더라도, 복수를 결심하거나 책을 통해 자신의 고통의 깊이를 서술하고 싶은 경우가 존재하는데, 그럴 경우 특정한 목적을 위해 삶의 지속을 스스로 요구하게 되므로 목적 달성을 위하여, 즉 일을 성취하기까지는 심리가 무너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보호기제가 작동하게 된다. 따라서 모든 것을 비참하게 여기기보다는 상대적으로 원한의 대상(앞선 경우 가정)이 되는 이 외의 사람들, 혹은 세상의 다른 일부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같은 상황에서도 보다 긍정적으로 인식하고 열려있거나 대체로 만족하는 경향을 보인다. 소소한 행복에 대해서도 남들보다 더 집착하고 맛을 더 갈망하게 되는 경우가 생기는데, 예를 들어 단 것을 지나치게 섭취한다거나, 캔커피를 단지 기분의 만족을 위해 하루에 10잔 이상 먹기도 하며, 콜라를 비슷한 정도로 먹는다거나, 혹은 담배를 그렇게 피는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 이는 단기적으로 해소하지 못하는 고통의 경우 점차 삶의 습관이 되어 중독으로 이어지게 되기도 하는데, 가령 알코올 중독의 경우 가장 치명적인 문제로 이상 행동을 반복하게 되고, 본인의 해마에 손상을 가하여 기억력에 이상이 오게 되며, 담배에 중독되는 것 또한 본인과 주변 지인의 폐질환을 유발할 수 있어 이 둘을 모두 주의해야한다. 차라리 같은 중독의 현상이라면 알코올의 경우 콜라, 담배의 경우 캔커피로 대체하여 그것이 삶에 주는 위해성을 줄이는 편이 나을 지도 모른다.

 허나 원한의 대상이 가정인 경우, 경제적 독립을 통해서 거주의 자유를 획득하지 못하는 경우 지속적으로 받는 고통과 더러운 기분들로 인해서 시간이 지날 수록 우울감에 젖어들며 그 대상이 점차 확대되어 세상으로 번지는 경우가 존재한다. 따라서 처음에는 가정환경의 부정적인 영향을 받았는지 여부에 부정적이지 않고 열려있어서 다가간 친구들이 점차 자기들이 살아온 세상을 가치관으로 내면화하여 폐쇄적인 것을 깨닫고 멀리하기도 하며, 또한 진심으로 그의 마음을 위로하지 않으며 힘들 때 곁에 있어주지 못하는 대상에 대해서는 기존에 가지고 있던 원한을 확대하여 그의 지인이나 세상에 대하여 이런 부정적인 감정을 투영하기도 한다. 비단 가정이 아니라 회사인들도 이러한 양상이 간혹 가다 생길 수 있지만, 그러나 대체로 동기들과 함께 분노상황, 고통을 겪고 이에 따른 아픔을 서로 공감하며 나누기 때문에 대부분은 그러한 상태로까지 이어지지 않는다. 허나 모종의 이유로 회사 내부에서 사내정치나 부정적인 여론형성등으로 원활한 소통이 되지 않는다면 고통을 토로할 대상이 없어져 자신의 슬픔을 꾹꾹 눌러담다보니 지인이나 가정에서의 행동에서도 점차 예민하게 반응하거나 공격적인 태도를 보이는 경우도 존재한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