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건국 1392
조선, 태조(1392~1398) :
조선 건국, 한양 천도, 경복궁 건설
한양 천도 1394
15C(1401~1500)
조선,태종(1400~1418) :
- 6조 직계제 실시
- 호패법, 신문고 제도 실시
- 사병 혁파
- 혼일강리역대국도 지도 제작
- 주자소 설치, 계미자 주조
조선, 세종(1418~1450) :
- 집현전 설치, 의정부 서사제 실시
- 영토 확장(4군 6진), 쓰시마섬(대마도) 정벌, 3포 개항, 계해약조 체결
- 『훈민정음』 창제/반포 (1446)
- 혼천의 / 앙부일구/ 자격루/ 측우기 제작, 갑인자 주조
- 『칠정산』, 『농사직설』, 『삼강행실도』 등 편찬
조선, 문종(1450~1452) :
- 세자시절부터 실무를 닦았으며 측우기 개발에 기여
- 『동국병감』, 『고려사』, 『고려사절요』, 『대학연의주석』 편찬
- 군사 제도 12사를 5사로 개편, 진법 등 연구
조선, 단종(1452~1455) :
- 수양대군(세조)의 정란(계유정난, 1453)으로 실권의 상실
신숙주의 배신, 숙주나물의 명칭 탄생
수양대군 측근 한명회, 권람 등의 선위 강요로 왕위 강제 이양, 상왕으로 물러남
김질, 정찬손의 배신으로 단종복위운동의 실패(1456), 사육신 사망
노산군이 된 단종, 영월로 유배됨(1457)
단종의 측근 금성대군의 복위 운동 실패(1457)
세조, 금성대군과 단종 사약 내리다.
* 민간신앙에서는 단종을 왕격의 신으로 추대하기도 함. 그러나 이것은 안타까운 심리를 이용해 세를 확장하려는 무속인의 심리로,
만 백성을 궁휼하고 깃든 사악함을 멸하고 선을 숭상하고 이를 가르친 신라의 정신에 따라 불교를 장려한 것에
기대어 볼 때 싹 다 잡아 쳐넣어 죽여도 무방함. 사이비 교주, 무속인 십중 팔구는 살인, 교사에 대한 제의를 밥
먹듯이 하는 무속인인데다가, 어차피 이 땅에 신라가 뿌린 씨앗과 도덕 정신에 혜택을 입지 않은 가문은 아무도 없으며
덕업신신 망라사방의 정신에 따라 신라 시대 초중기에 모두 배불리 먹었음을 유념해야 함. 신라가 불교를 장려했던 까닭은
걸출한 인물 원효를 배출한 가문탓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사악한 간계와 혀로 세를 불려 혼탁함을 퍼트리려고 한 무속인과
배반자들을 청산하고 멸악을 함으로써 하나로 나라를 일통하는 것을 유지하기 위함이었음을 이해해야.
선덕여왕 말기에 유독 불교를 장려한 일들은 이러한 점에 기인함. 만약 지금의 시대였다면 카톨릭을 국교로 삼았을 것.
특이하게 보이는 현상들은 그 시대의 눈으로 보아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는 점..
* 불교가 국교가 되면 승려가 부패할 위험이 있었고 유교가 국교가 되면 무속을 숭상하는 백성의 심리를 통제할 방법이 없었음도 이해해야.
*제도의 탄탄함에도 후반기로 갈수록 심해지는 조선 쇠국의 원인은 곳곳에 번진 왕권에 반하는 무속신앙의 병폐라고도 볼 수 있음
*이 글은 종손의 입장에서 쓰는 거라 다분히 감정적일 수도 있지만, 일정 부분 사실에 기반함을 고려해주길..
조선, 찬탈자 세조(1455~1468) :
- 단종을 몰아내고 즉위(1455)
- 6조 직계제 실시, 집현전 폐지, 경연 폐지
- 직전법 실시
- 『경국대전』 편찬 시작
조선, 성종(1469~1494) :
- 『경국대전』 완성·반포(1485)
- 홍문관 설치, 경연 활성화
- 관수 관급제 실시
- 『동국통감』, 『악학궤범』, 『동국여지승람』 등 편찬
조선, 연산군(1494~1506) :
- 무오사화 발생(1498)
- 갑자사화 발생(1504)
16C(1501~1600)
조선, 중종반정 1506
조선, 중종(1506~1544) :
- 반정으로 연산군을 몰아내고 즉위
- 3포 왜란 발생(1510)
- 조광조의 개혁정치
- 기묘사화 발생(1519)
조선, 명종(1545~1567) :
- 을사사화 발생(1545)
- 을묘왜변 발생(1555)
조선, 선조(1567~1608) :
- 동인/서인의 붕당 발생
- 정여립 모반 사건 → 동인이 남인/북인으로 분화
- 임진왜란 발발(1592)
- 훈련도감 설치(1593)
17C(1601~1700)
조선, 혜종(광해군, 1608~1623) :
- 전후 복구 정책
- 궁궐 복구 비용으로 원성을 삼
- 중립 외교 전개 → 강홍립 파견
- 대동법 최초 실시(경기 지역)
- 기유약조 체결(1609)
- 『동의보감』 편찬(허준)
*유교의 병폐 중 또 다른 점은 대다수의 정상적인 가정에서는 통상적이지만, 특수한 환경에서 발생한 부모나 형, 스승의 악행도
무조건적 정당화되고, 이에 대해 사회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규제할 방법이 없다는 점, 일부 다처제임에도 발생한
서자에 대한 차별 등. 서자에 대한 차별 구분이 정치적으로는 허용될 수 있으나 일부 일처제를 확립시키지 못했다는 점에서 이율배반적.
이것은 사회적 지지를 잃어버린 혜종(광해군)의 폐위에도 결정적 영향을 미침.
*현대 정치 제도에 있어서도, 단순히 인식의 편의로 나눈 이분법적 정책이 오히려 사각지대와 사회의 병폐를 키우고 있는 점에 주의할 필요가 있음. 현재 부모자식과 형제자매등의 수익, 환경을 묶음으로 보아 장학/지원 제도의 구분을 나누는데, 탈출하고 싶어도 자식은 부모에게 인생을 저당잡히고 제와 매는 형과 자에게 묶여 있는 형국일 수 있다는 기초적인 생각을 할 필요가 있음. 한국과 서양의 복지제도간 기회의 공정성에 대한 실효성의 차이는 이런 연좌제적 시선의 유무에 근간한다고 볼 수도 있음.
* 물론, 서양같은 경우 국가와 세상에 기여를 잘 한 사람일 수록 더 많은 부와 영향력을 형성하는 단초가 되었다면, 한국의 경우 역사적으로 그렇지 못한 경우가 더 많았던 것도 이런 잘못된 인식을 정당화하는데 하나의 요인이 됨. 따라서 친일정치에 대한 청산은 청산대로, 독립 유공자의 경우 보상을 보상대로 하는 기존 역사상의 불공정 및 국가에 대한 불신 청산을 병행하되, 법과 제도, 매뉴얼 설계에 있어서 단순히 하나의 편견으로 둘로 나누는 것이 아니라 케이스 바이 케이스를 모두 상세하게 나누어 억울한 피해자나 소외되는 자가 없도록 설계하는 것이 필요하다. 더 나아가, 매뉴얼대로 하면 피해나 질책을 받도록 잘못 설계되어 있고 도리어 매뉴얼을 벗어난 융통성을 사회적으로 요구 받는 한국의 현 실정을 고려하면, 현재처럼 법제에 있어 현재 볼 수 있고 현재 생각하기 쉽고 딱 둘로 나누어 간주하기 쉬운 것만 고려하는 것이 아닌, 매뉴얼 자체를 케이스바이 케이스로 예상할 수 있는 갈래와 십년 백년 천년 만년 후에라도 만약에라도 발생할 수 있는 모든 케이스를 고려하여 설계하는 자세로의 전환이 요구된다.
조선, 인조반정(1623)
조선, 찬탈자 인조(1623~1649) :
- 반정으로 혜종(광해군)을 몰아내고 즉위
- 친명배금 정책 추진
- 이괄의 난 발생(1624)
- 정묘호란(1627)·병자호란(1636) 발발
- 영정법(전세를 토지 1결당 미곡 4두로 고정) 실시
- 어영청·총융청·수어청 실시
- 소현세자, 청의 볼모 생활을 통해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며 계몽군주의 자질을 획득, 성장
- 소현세자, 외국의 문물과 카톨릭 유입 시도, 청나라에 포섭된 걸로 오인한 인조의 눈 밖에 나서 사망
* 여기서 소현세자가 하고 많은 문화 중에 왜 카톨릭을 유입하려고 했는지 위의 언급 내용을 보면 이해할 수 있다.
조선, 효종(1649~1659) :
- 북벌운동
- 조총 부대 파견(나선 정벌: 선: 조선, 나:라, 루스 차르국 → 즉 러시아와 조청 연합과의 격돌)
조선, 현종(1659~1674) :
- 제 1 차 예송(서인 승)
- 제 2 차 예송(남인 승)
조선, 숙종(1674~1720) :
금위영 설치 → 5군영*체제 완성
대동법 전국적 실시
상평통보 전국적 유통
환국 정치(경신환국(1680), 기사환국(1689), 갑술환국(1694))
백두산정계비 설립
*5군영 : 훈련도감(선조) / 어영청·총융청·수어청(인조) / 금위영(숙종)으로 이뤄어진, 양란 이후 수립된 수도와 그 외곽을 방어하는 5개의 군영
기존 5위 체제의 방어의 효과성이 부족함에 위기감을 느껴 새로이 구축된 체제.
18C(1701~1800)
조선, 경종(1720~1724) :
희빈 장씨의 아들(소론의 지지를 업고 즉위)
* 경종은 영조가 올린 게장과 감을 먹고 사망했다는 설이 있다. 이 설에 따르면, 영조는 찬탈자일 수가 있다.
다만 뚜렷한 증거가 없다. 게장과 감 자체도 복통을 유발하는 것은 사실이나, 과연 결정적이었는가가 의문이다.
다만, 게장이 검은 색이므로, 궁중 의원 중 누군가 사약이나 독을 타더라도 구분할 수 없다는 점은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독살이더라도, 그것이 소론에 의해서 이루어졌는지 노론에 의해서 이루어졌는지, 영조 본인에 의해서 이뤄졌는 지는 알 수 없다.
조선, 영조(1724~1776) :
- 탕평책 전개(탕평파 육성) → 재위 기간 내 효과는 거두지 못함
- 탕평비 건립
- 균역법(1750) 실시: 군포 부담 경감 - 군포 16月 2필에서 12月 1필, 어염세/선세를 균역청에서 거둠, 선무군관포
- 『속대전』등 편찬
*균역법에 대한 상세 내용 이해: 16개월마다 2필을 납부하던 것을 12개월에 1필을 수납/ 보유한 재원을 옮겨오거나, 어염세(魚鹽稅)나 선세(船稅) 등을 균역청에서 거두도록 하여 재정에 보탬/ 부유한 양인의 자제들이 양반으로 신분을 위조하여 군포를 기피하고 있었는데, 이들을 일일이 적발해 내는 대신 선무군관(選武軍官)이라는 칭호를 주고 그 대가로 포 1필씩을 징수
조선, 정조(1776~1800) :
- 탕평책 전개(노론/소론 외 남인 적극 등용)
- 초계문신제 실시, 규장각/장용영 설치
- 수원 화성 건설
- 신해통공 단행, 신해박해(1791)
- 『대전통편』, 『무예도보통지』 등 편찬
* 신해통공: 채제공(蔡濟恭)은 시전의 금난전권으로 인해 소상인과 소상품생산자가 자유로운 상행위를 할 수 없어 유통구조가 원활하지 못하고, 극심한 물가상승으로 인해 도시민의 생활이 어렵다고 하였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책으로, 상품의 자유로운 매매를 위해 30년 이내에 설립된 작은 시전은 폐지하고, 육의전을 제외한 시전의 금난전권을 혁파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취지와 달리 독점 및 포졸과의 결탁을 이룬 사상은 매점매석행위를 그치지 않았고 물가는 잡히지 않았다.
19C(1801~1900) + 일제강점기 전 (1901~1910)
조선, 순조(1800~1834) :
-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
- 공노비 해방(1801)
- 신유박해(1801)
- 홍경래의 난 발생(1811)
조선, 철종(1849~1863) :
-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
- 임술 농민 봉기 발생(1862), 삼정이정청 설치
조선, 고종(1863~1907) :
- 호포제 실시, 사창제 실시, 서원 정리, 경복궁 중건 - 당백전 발행, 척화비 건립(흥선 대원군)
- 병인박해(1866. 정월: 2월 23일부터~ 1873까지 지속)*
- 제너럴셔먼호 사건(1866. 8月)
- 병인양요(1866. 10月)
- 독일인 오페르트의 남연군묘 도굴사건(1868. 05)
- 신미양요(1871)
- 강화도조약(1876)
- 조미수호통상조약(1882)*
- 임오군란(1882)
- 갑신정변(1884)
- 을미사변, 단발령(1895), 을미의병(1895)
- 아관파천(1896)
- 대한 제국 선포(1897)
- 한일의정서(1904)
- 을사늑약(1905), 을사의병(1905)
* 대원군이 변심한 연원, 그리고 영영 잃어버린 호의적 함대/ 군사기술 수입의 기회(놓쳐버린 골든 타임)..
기술 수입에 있어 조선의 국부[금 보유량]가 과연 부족했는가 하는 부문은 : [1] [2] [3]를 참고
* 거중조정은 미사여구였고, 가쓰라 태프트 밀약이 발생: 1905년 7월 29일, 미국의 제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특사인 미국 전쟁부(United States Department of War) 장관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와 일본 제국의 총리 가쓰라 다로가 도쿄에서 은밀하게 맺은 협정
조선, 순종(1907~1910) :
- 고종,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알리는 헤이그 특사 파견(1907, 4月에 파견, 6月에 도착)
- 고종 강제 퇴위(1907. 07. 19)
- 한일 신협약(정미7조약) 체결(1907. 07. 24), 정미의병(1907. 08. 01 ~ 1910)
- 일제의 국권 침탈(1910)
* 일제가 순종을 즉위시킨 이유에 기존 고종을 겨냥하여 검은 가배(커피)에 탄 독을 어린 순종이 잘못 마심으로 인하여 정신이 이상해졌다는 설이 있음. 즉, 원하는 대로 조작할 수 있는 완벽한 허수아비로 적절했을 것이라 보는 것이 일반적.
국권상실 : 일제강점기(1910. 08. 29~ 1945. 08. 15)
이로써 신라와 백제의 왕실의 종손과 귀족의 후손이 버젓이 살아있는 조선-대한제국이, 한 때 두루마리 훈도시만 거친 외딴 정글섬의 수렵 채집 집단에 가까웠던 민족에게 문화교육과 세공과 금속 가공/ 농경 기술등의 가르침을 주었던(일왕이 힘이 없음에도 일본 내에서 역사적으로 일본내에서 천天의 격을 붙여 신성불가침이 된 이유는 백제 귀족과 일본인의 문화적 차이의 격이 너무 높았기 때문에 결국 대신들이 힘으로 강탈하더라도 국민의 격이 하향평준화되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 그 후예에게 예에 맞는 존경과 공경이 아닌 도리어 조롱과 멸시를 당하며 지배를 당하는 굴욕, 오욕의 역사를 지나게 된다. 이런 일본인들 중 뿌리가 좋지 않은 자들의 특성을 몰랐던 미국은 일본 민족 전부를 약속을 지키는 민족으로 착각하여, 부화뇌동, 감탄고토, 구밀복검하는 자를 심복으로 두었고 결국 진주만 습격이라는 사태를 당하게 되고 그 때서야 어떤 민족인지 깨닫게 된다. 대한민국의 일원이라면, 자기 세뇌와 정신승리를 하거나 개인의 이익을 위해 빌붙어먹기보다, 와신상담하는 자세로 이 쓰디쓴 웅담같은 역사를 되새길 줄 알아야 지피지기를 할 수 있으며 그래야 먼 미래에 있어서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의 승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미국도 자국민을 위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아야 한다. (같은 의미에서 중국도 한 고조 유방 시절부터 대표적인 감탄고토 & 구밀복검의 대명사로 항상 주의하여야 한다.)
* 그렇다고 현대 일본의 문화 수준이 낮다거나 그것을 비판하려는 것은 아니다. 한국을 존중하고 역사의식이 바르게 잡혀 있는 현대 일본인까지 모두 비판의 대상인 것은 아니다. 과거는 과거이고, 현재는 현재이기에 과거사에 대한 인정과 반성 속에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일본인이라면 얼마든지 교류할 가치가 있다고 본다. 인류는 모두 태초에는 알몸이었고 단지 여러 우연과 인연, 기회 속에 기술들이 발달해 온 것이다. 현대 문명은 현재 각국 모두가 충분히 향유하고 있으며 바른 의식 속에 인간으로서 수준을 꾸준히 향상시키고 발전시켜온 자라면 의미있는 사회적 부가가치를 창출했을 수 있으며, 교류할 가치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다만, 부끄럽다 하여 과거사를 자꾸 덮으려고 하고 없는 일이라고 하고 오히려 역사왜곡까지하면서 한국인들을 경멸하고 멸시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정말 과거사를 명명백백하게 밝히자고 따지고 들면 그들이 우리에게 차마 들 낯이 없으며 어떠한 부분에 있어서도 그들이 우리에게 예와 경의 그리고 사죄를 표해야하지 반대의 행위(오만불손한 행위, 교만, 경멸, 멸시, 차별)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다. 정신이 좀 혼탁하거나 전범을 숭상하고 역사왜곡을 하는 자들이 그런 자들로, 나는 그런 자들 중 정체가 밝혀진 자와는 교류하지 않겠다. 반대로 마음이 맑고 진정으로 우리 문화를 존중하고 사랑하며 진정 평화를 추구하고 서로 미래지향적이고 발전적인 사회를 꾸려나가려고 평생을 노력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하고는 일인이라 할지라도 함께 교류하고 싶다. 나는 신라 황실 종친 중에서도 미천하고 어린 자 중 하나로 사실 대표한다거나 그런 일말의 영향은 없지만, 만약 내가 크게 성장하여 대표할 권한이 있고, 상대가 과거를 뉘우치고 반전을 추구하며 한국을 지지하고 따스함으로 문화상의 교류를 이루는 사카모토 류이치와 같은 사람이라면 그들에게 명예 작위를 내려서라도 그들과의 교류를 긍정하고 싶다. 사실 종친으로서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하는 분노감에 좀 비판적으로 적다가, 그런 사람들이 떠올라서 글을 고치고 또 고쳐 수정하여 작성한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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