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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a philosophie >/통찰

세 가지 형태의 카르마

첫째는 인륜이라는 의미, 즉 세상 전체를 꼭대기에서 바라본다면 결국 사회란 인간과 인간이 손을 맞잡고 쭉 이어져 있는 것과 같아서 결국 내가 한 손으로 한 행위가 결국 내 다른 손으로 돌아온다는 의미이다. 어떤 측면에서 아담 스미스가 의미한 보이지 않는 손이란 이러한 의미도 같이 포괄하였을 수 있다. (*아담 스미스는 경제학자로만 알려져 있지만 윤리학자이다.) 철학자나 종교학자 등이 아닌 일반적인 경우에 삶에서 체험적으로 느끼는 카르마란 아마 이런 부류의 것일 것이다.

 

둘째는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의미에서의 카르마로, 다소 종교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허나, 일단 살펴보자면 인간은 누구나 저승에 대해서 생각을 하는데, 보통 종교에 귀의해 가르침에 맞게 살면 끝! 죽어서 행복! 이렇게 생각한다. 허나 그렇다고 누가 과연 단언할 수 있는가? 나 같은 경우 카톨릭을 믿는데 한편으로 일생을 선하게 살아서 전생을 신께 판별받고 천사의 무리 중 일원이 되어 우주 바깥(나는 성경에서의 천상의 의미가 모든 우주의 밖이라고 생각한다)의 천상(블랙홀에서 빨아들인 모든 빛이 있는 화이트홀 바깥의 세상이 새하얀 빛의 세상이 아닐까?)에 이르더라도, 500년 1000년 있다가 적당히 쉬었고 슬슬 내려다본 지구의 모습에서의 인간들의 양태가 재미있고 흥미진진하다 싶을 때쯤, 마침 신이 세상을 도우라는 임무를 줘서 다시 내려보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천상이 편해도, 신께서 말씀하시는데 까라면 까야지, 어쩌겠는가? 또 한편으로 전생에 선한 업을 이루었어도 너무 오래 천상에 있다보니 편하게 생각한- 혹은 어쩌면 너무 지나친 정의감에 휩싸여 한순간의 잘못된 판단으로- 편하고 좋은 곳에서 투어하고 오는 것이 아니라 힘들고 고달픈 환경에 태어나 사람들을 돕고 오겠다고 선택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과연 아니라는 법이 있는가? 한편으로 불교같은 경우에도, 윤회라는 개념이 있고 이는 모든 존재가 다시 태어남을 의미한다. 불가에서는 관음보살이라는 개념이 있는데 이것이 이미 열반에 이를 자격이 있어서 해탈할 수 있음에도 해탈하지 않고 보다 많은 인간을 구제하기 위해 스스로 세속에 머무르길 택함이라고 한다. 혹은, 부처가 다시 세상에 어린 모습으로 태어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하니, 즉 저승에서 이승에 얽매이지 않고 이미 성불, 피안으로 떠날 자격을 갖추었거나 이미 떠났음에도 다시 이 세계로 탄생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특히 예전에는 부처가 아이의 모습으로 태어나 소를 몰고 다니는데, 어리석은 이들을 이 총명한 아이가 깨우치는 말을 하고 홀연히 사라지는 설화들이 담겨있고, 티베트 불교의 달라이라마라는 전승 또한 이러한 측면을 담고 있는데 이러한 의미에서, 윤회라는 개념은 세상에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의미이며 따라서 현생만 생각하여 나 자신, 혹은 자손만 잘 살고 잘 먹으면 되지, 큰 악행만 아니면 되지 이렇게 생각하고 넘어갈 것이 아니라, 다시 태어났을 때의 내 영혼이 억울하고 부당한 사회 질서나 절차의 원칙으로 인해 상처입고 피해받지 않도록 할 것을 생각하여 사회 정의에 힘써야 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한편으로는 그러한 설화들에서 유독 아이의 모습을 부처가 등장하는 것은 이런 의미도 담겨있다고 본다. 꼰대들이여, 어린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팩트에 대해서 경청하라- 부처일지 그냥 무지한 아이의 치기인지 그것은 사실 모르는 것이다. 예수님도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올 수 있고, 부처도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올 수 있다. 우리는 그들에 대해서 무엇을 말하며 무엇을 이치라 논하는지, 혹시 스스로도 납득하지 못하면서 무턱대고 강요하며 정당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경계하여야 한다. 5살 짜리 아이도 이해하도록 설명할 줄 알아야 무언가를 제대로 이해한 것이라는 말은 이를 의미하는 것일 수 있다.)

 

셋째, 본디 불교라는 것이 종교화되기 이전의 단계에서는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싯다르타의 제자 무리였다는 것을 생각할 때, 열심히 염불을 왼다고 해서 어디 저승의 무리가 날라와서 인간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고ㅡ 단지 자기 자신의 마음을 

(종교적인 문구가 적혀있는 것은 사실이나, 불가에서 염불을 외는 것의 실체적인 의미에 대해서는 심신을 안정시켜 일체의 상에 대한 집착과 두려움 그리고 분노와 같은 일체의 화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봐야하는 것이다.) 다스려 다음의 순간에 내가 그 오온과 집착에 빠진 상태에 의해 스스로를 괴롭히고 어리석은 행동을 하여 평정을 잃지 않도록 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여기에서의 카르마라는 의미는 당면한 순간 순간의 개인의 내면과 외부에서 상호작용하는 인과의 의미이며 이러한 인과가 좋은 마음을 먹으면 좋은 일들로 스스로의 몸과 마음을 시간을 다스려 지키고 효율적이고 원만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으며, 반대로 마땅히 그렇게 화를 낼 필요성이 없는 일에도 나라는 상과 분노하는 나 자신에 대한 애착이나 마음에 갇힌다면 스스로의 몸과 마음을 훼손하고 소중한 시간을 뺏기며 이에 또 분개하는 마음이 생기게 되니 악순환의 인과가 계속해서 일어나게 된다. 즉 slippery slope와도 비슷한 개념이다. 따라서 자이나교에서 카르마의 두번째의 의미, 즉 종교적인 의미 중 윤회만 생각하여 스스로를 고행으로 다스려 악한 죄업을 소멸시키고, 선행만 하여 선한 업만 쌓이도록 함으로 내세에서의 환생, 재탄생에서 좋은 상태로 태어나고자 한다는 개념에 천착하고 집착하느라 일단의 무리가 평생 고행만 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고타마 싯다르타도 그러한 고행체험을 해보다 보리수 아래서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즉, 고행주의적 출가는 비록 미래의 주사위 돌리기에서 유리한 고지를 범하게 할 지 모르나 자신의 태어나는 위치만 달라질 뿐 이후 그들이 태어나 있을 세계를 보다 낫게 하지도, 스스로를 행복하게 하지도 못하며 따라서 현세와 미래의 나의 사는 모습을 낫게 하지 못하기에, 그 또한 일체의 상에 집착하여 갇힌 것으로 화에 갇힌 상태와 같은 것으로 본 것이며 이는 카르마를 slippery slope로서의 측면에서도 또한 살핀 통찰에서 근간한 것이다. 따라서 윤회에라는 것에 대한 집착에서 조차 벗어나 Nirvana, 열반 즉 스스로의 일체의 집착에서 벗어나 얽매이지 않는 상태로 마음의 평정을 유지해야 종교적 의미에서의 카르마를 떠나, 어쨌거나 생은 고통이나 생이 붙어있어 이 땅에 발 디디고 살아가는 한 이러한 육신이 의도해도 의도하지 않아도 마음의 상을 끊임없이 불러일으키는 자연스러운 흐름에서 벗어날 수 없으므로 현세에 실존하는 존재로서 무아무상을 자각하여 카르마를 제대로 잘 다스리는 것이거나 얽매임이 없도록 해야하는 것이 그의 강조점이었고 또한 그렇기에 어떻게 보면 자연 경험적으로 모두가 당연히 아는 사실인 인과 과의 연결고리를 그렇게 강조한 것이다. 인이 있으면 과가 있기에 이를 마음 또한 스스로 일체의 집착에 갇히지 않도록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다. 일체의 상이 마음과 육신에 바람같이 왔다가 바람같이 가도록 하면 그만이라는 것. 약간은 즐기고 약간은 멀리하고 약간은 경계를 두고 약간은 가까이 하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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